한국은 어떻게 해야 하나?
베르세로 연구원, 한·EU FTA 수석협상가
미국은 국제 무역규범 틀 완전 포기
중국은 막대한 보조금, 강압적 수단
"한국, CPTPP·MPIA 참여 등 다자연대 필요"
"향후 최소 7년에서 10년 정도는 글로벌 무역 질서가 부재한 상태를 염두에 두고 준비해야 한다. 그 기간에는 WTO 규칙을 계속 존중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동시에, 새로운 틀을 시작하려는 최대한 큰 국가 연합이 필요하다. 한국은 미국과 중국 가운데 특정 국가에 의존하기보다, 신뢰할 수 있는 무역 파트너와의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 더 넓은 다자 연합을 통해 안정성을 확보해야 한다. EU(유럽연합)와의 협력이 그 핵심축이 될 수 있다."
이그나시오 가르시아 베르세로 브뤼겔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세계 무역질서의 변화와 한국이 가야할 길'을 주제로 한 아시아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베르세로 연구원은 EU 집행위원회에서 30년 넘게 통상 정책을 담당해온 대표적 베테랑 관료다. 1987년부터 집행위에서 활동하며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에 참여했고, 이후 뉴욕 유엔 대표부에서 근무했다. 특히 2009년 한-EU FTA 협상의 EU 측 수석대표를 맡아 타결을 이끌었다.
베르세로 연구원은 오늘날 미국이 법 기반의 통상 질서를 외면하고, 중국이 훨씬 더 공격적인 산업정책을 구사하는 현실 속에서 한국과 같은 무역의존도가 높은 국가는 어느 한쪽에 과도하게 기울어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면서 자유무역을 강조하는 국가들과 힘을 모아 다자 통상 연합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베르세로 연구원은 기존의 다자 통상체제가 힘을 잃고 있는 상황에서는 법 기반 무역을 존중하는 국가 간 연합이 필수적이라고 진단했다. 그가 한국에 제시한 구체적 해법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과 임시상소중재(MPIA) 참여다. 베르세로 연구원은 "한국은 반미·반중이라는 단순 구도가 아니라 '법 기반 무역 연합'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며 "CPTPP 가입은 농업 문제로 난관이 있지만, EU·CPTPP·아세안과의 협력 구도에 한국이 참여하는 것은 전략적으로 중요하다"고 제언했다. 이어 그는 "한국이 다자 분쟁해결 대체 절차인 MPIA에 참여하지 않은 점은 반드시 재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다음은 지난달 25일 전화로 진행된 베르세로 연구원과의 일문일답.
-미국이 다자 통상 체제에서 이탈하더라도, EU와 중국 같은 주요 WTO 회원국들이 여전히 상호주의적 통상 규범을 지킬 수 있다고 보는가.
▲좋은 질문이다. 현재 미국은 사실상 국제무역 규범의 기본 틀을 완전히 포기했고 WTO의 근본 원칙들에 정면으로 반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 중국은 입장이 조금 더 복잡하다. 한편으로는 WTO 규범을 지킨다고 주장하고 있고, WTO 일부 회원국들이 참여하는 다자간 임시중재합의(MPIA)에도 가입했다. 불공정 무역행위 심판 제도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중국의 경제 모델은 막대한 보조금에 기반해 글로벌 공급과잉을 초래했고 지정학적·경제적 목표를 위해 강압적 수단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EU는 WTO 규범을 준수하고 동시에 WTO 개혁을 주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현재 체제는 지속 가능하지 않으므로 개혁이 불가피하다. 아울러 EU는 미국과 중국의 강압적 조치에도 대응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 지금까지는 충분히 적극적이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재고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EU는 WTO와 그 개혁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필요시 강압적 조치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
-글로벌 무역이 두 개의 블록으로 분열되고 있다는 진단도 있다. EU·한국·일본은 미국과 보조를 맞추고, 반대로 중국·인도·브라질은 이를 견제하는 구도가 형성되고 있다고 보는가.
▲현재 상황을 두 개의 무역 블록이 형성되고 있다고 보기는 이르다. EU는 반 중국 블록의 일원으로 자신을 규정하지 않는다. EU는 메르코수르(MERCOSUR, 남미공동시장)와의 FTA 비준 절차를 앞두고 있으며, 인도·인도네시아 등 BRICS 회원국들 및 아시아 국가들과도 협상을 진행 중이다.
EU가 중시하는 것은 법 기반(rule-based) 무역을 지지하는 국가들과의 연대다. CPTPP 회원국은 물론 한국 역시 이 연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다만 한국이 여전히 WTO 2심 분쟁 해결을 보장하는 다자 MPIA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 점은 아쉽다. 한국이 조속히 이 제도에 참여해야 한다고 본다.
-트럼프 행정부 3년간 미국과의 관세 합의가 유지된다면, EU의 GDP·고용·산업별 교역에 어떤 영향이 있다고 보는가.
▲향후 3년간 미국과의 관세 합의가 유지된다면, EU 경제에 미치는 직접적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다. 미국은 단기간 내 EU 수입품을 대체할 산업 역량이 부족하고, EU의 경쟁 지위도 일본·한국과 유사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EU는 이 기간을 활용해 자국 경제 경쟁력을 강화하고 메르코수르·아시아 주요국과의 FTA를 마무리하며 CPTPP 등과의 연대를 확대해야 한다.
-앞서 EU가 미국과 중국의 강압적 조치에 대응해야 한다고 했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나.
▲EU는 반 강압 수단을 도입했다. 제3국이 강압을 가할 경우 보복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제도다. 예컨대 미국이 고율 관세를 협상 압박 수단으로 사용한 것은 전형적인 강압 행위였다. 그때 EU가 이 수단을 가동하지 않은 것은 실수였다. 즉각 보복까지는 아니더라도, 필요시 대응하겠다는 신호는 분명히 보냈어야 한다. 중국 역시 핵심 원자재 공급망에서 강한 지위를 바탕으로 EU를 압박할 수 있다. 따라서 EU는 중국에도 명확한 대응 의지를 보여야 한다. 지정학적 긴장이 커지는 상황에서 이 수단은 앞으로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독일·프랑스·이탈리아 등 주요국의 대미 통상 전략이나 태도가 서로 다르다. EU가 통일된 통상정책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보는가.
▲회원국 간 이해가 엇갈려 EU가 단일한 통상정책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주요국의 대미 통상 입장이 다르다. 그러나 실제 EU에 외부 강압이 가해진다면 다수 회원국이 대응에 찬성할 가능성이 크다. EU는 만장일치가 아니라 다수결(qualified majority)로도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통일된 대응이 가능하다.
-미국이 빠진 상태에서 새로운 무역질서를 만든다고 해도, 무역의 속성상 어떤 국가는 불가피하게 이익을 보고 또 어떤 국가는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구조적 한계를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말해서 글로벌 무역체제를 개혁하기 위한 다자간 합의는 미국과 중국이 모두 이러한 다자적 구상에 전면적으로 참여할 준비가 되기 전까지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이는 향후 3년 안에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향후 미국 행정부가 강한 의지를 보이더라도,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하며 이를 달성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에 따라 최소 7년에서 10년 정도는 글로벌 무역 질서가 부재한 상태를 염두에 두고 준비해야 한다.
그 기간에는 WTO 규칙을 계속 존중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동시에, 새로운 틀을 시작하려는 최대한 큰 국가 연합이 필요하다. 현실적으로 향후 7~10년간은 글로벌 차원의 통상 체제가 아니라, 법 기반 무역을 존중하는 국가들의 연합이 필요하다. EU, CPTPP, EFTA(유럽자유무역연합), 아세안 일부 국가, 한국 등이 참여해 디지털 무역, 공급망 회복력, 기후·통상 연계 규범 등을 논의해야 한다. 이러한 움직임이 누적되면 장기적으로 미국과 중국도 개혁 논의에 참여할 여지가 생길 것이다.
-앞서 언급한 광범위한 연합은 어디서부터 시작할 수 있나.
▲디지털 무역, 공급망 회복력, 무역과 기후의 접점과 같은 사안에서 각국이 협력을 시작해 글로벌 무역 규범이 현실에 맞게 개선되도록 해야 한다. 1995년과 비교하면 오늘날 세계는 매우 다르다. 따라서 미국이나 중국의 결정에 의존하지 않고도 이를 추진할 수 있도록 재구조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왜냐하면 미국과 중국은 앞으로도 지정학적 갈등에 깊이 얽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U와 CPTPP가 글로벌 무역 규범을 새롭게 구축하기 위한 합의에 나설 수 있으며, 일부 분야에서 협력을 먼저 시작한 뒤 이 과정에 관심 있는 다른 국가들을 초청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한국이 비록 CPTPP 회원국은 아니더라도, 이 작업에 참여하는 국가들 가운데 하나가 되기를 바란다. 다시 말하면 EU와 CPTPP 간 협력이 출발점이 될 수 있고, 이를 토대로 한국 등 관심 있는 국가를 초대하는 게 중요하다. 다만 한국이 MPIA에 참여하지 않은 점은 반드시 재검토해야 한다.
-한국은 수출주도형 경제 구조 탓에 관세 전쟁에 특히 취약하다. 미·중 갈등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이재명 정부는 새로운 통상 전략을 마련해야 하는데, 한국이 직면한 가장 큰 리스크는 무엇이며, 어떤 대응책이 필요하다고 보는가.
▲한국은 미·중 갈등 속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볼 수 있는 국가 중 하나다. 안보는 미국에 의존하지만, 무역은 중국과 깊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양자택일을 강요받는 상황은 한국에 치명적일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은 반미·반중이 아닌 '법 기반 무역 연합'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CPTPP 가입은 농업 문제로 어려움이 있지만, EU·CPTPP·아세안과의 협력 구도에 한국이 참여하는 것은 전략적으로 중요하다.
-2009년에 한국에 왔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당시 경험은 어땠나.
▲당시 나는 EU 수석 협상가로서 한국과 FTA를 협상했다. 최소 10차례 이상 서울을 방문했다. 한국 협상단은 매우 전문적이고 준비가 철저했다. '빨리빨리' 문화 덕분에 협상이 신속히 진행됐다. 미국-한국 협정이 발효되기 전에 이 협상이 진행됐는데, 그 당시 협상은 매우 치열한 시기였다. 그리고 협정의 일부 조항, 특히 자동차 부문과 관련해 유럽연합 내부에서 논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협정이 EU 이사회와 유럽의회에서 매우 신속하게 비준됐다. 내 생각에는 양측 모두 이 결과에 상당히 만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한-EU FTA는 한·미 FTA보다 먼저 발효됐다. 이는 EU 최초의 포괄적 FTA였고, 지금까지도 양측 모두 만족할 만한 성과로 평가된다.
-2009년과 비교했을 때, 현재 한국은 통상 분야에서 어떻게 달라졌나. 한국에 어떤 전략이 필요하나.
▲그 당시만 해도 WTO 분쟁 해결 시스템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 모든 국가가 기본적으로 WTO 규칙을 준수하고 있었고, 미국도 여전히 무역협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미국은 태평양 지역에서의 무역협정과 유럽연합과의 무역협정을 협상 중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미국이 법 기반 통상을 외면하고 있으며, 중국은 훨씬 공격적인 산업정책을 펴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한국처럼 무역 의존도가 높은 국가는 미국과 중국 어느 한쪽에 과도하게 의존하기보다 신뢰할 수 있는 무역 파트너와의 연대를 강화하고, 더 넓은 다자 연합을 통해 안정성을 확보해야 한다. EU와의 협력이 그 핵심축으로 중요하다.
김민영 기자 argu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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