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 오염 주범인 '문제 산업'에서 '기후 대응 주체'로
물·이산화탄소·생물학적 재현 통한 과학적·현실적 해법
인류는 기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성층권에 에어로졸을 살포하거나 바다에 철분을 뿌리는 등 지구 시스템을 직접 조작하는 '지구공학(geoengineering)'에 눈을 돌리고 있다. 이는 외과적 수술처럼 빠른 효과를 기대할 수 있지만, 강수 패턴의 변화, 생태계 교란, 국제 분쟁 같은 부작용을 동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논란을 낳고 있다.
이에 대한 또 다른 접근이 '블루 케미스트리(Blue Chemistry)'다. 물과 화학 반응을 매개로 대기와 해양의 균형을 간접적으로 조정하려는 시도다. 지구공학이 전격적인 외과수술이라면 블루 케미스트리는 약학적 처방에 가깝다. 속도는 더디지만, 체질을 바꿔 지속 가능한 변화를 유도하겠다는 접근이다. 물론 이 역시 불확실성과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다. 화학 반응은 임계점을 건드릴 경우 급격한 변화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한 검증과 사회적 합의가 필수적이다.

지구공학이 전격적인 외과수술이라면 블루 케미스트리는 약학적 처방에 가깝다. 속도는 더디지만 체질을 바꿔 지속 가능한 변화를 유도하겠다는 접근이다. 픽사베이 제공
화학, '문제 산업'에서 '기후 대응 주체'로
블루 케미스트리는 오랫동안 '문제를 일으키는 산업'으로 낙인돼온 화학을 환경 회복의 도구로 재배치하려는 발상이다. '화학물질'이라는 단어가 위험을 떠올리게 했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이제 화학을 기후 대응의 새로운 주체로 세우려는 것이다. 이런 배경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다. 하나는 탄소 배출과 오염의 주범으로 지목된 화학 산업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전환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이고, 다른 하나는 물 부족, 해양 산성화 같은 기후 위기 속에서 화학적 대응 없이는 문제를 풀 수 없다는 과학적 현실이다.
이를 위해 블루 케미스트리가 먼저 접근한 것은 '물'이다. 기후 위기는 곧 물 부족 위기로 이어진다. 알프스와 히말라야의 빙하는 빠르게 줄어들고, 이를 수원지로 삼아온 지역들은 심각한 갈등에 직면하고 있다. 새로운 수원을 찾기보다 기존 자원을 재활용하고 대체 수원을 확보하는 것이 현실적인 해법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재생수' 기술이다. 하수와 폐수를 고도 처리해 농업이나 산업용수로 돌려쓰는 방식으로, 이미 이스라엘은 전체 농업용수의 80% 이상을 재생수로 충당하고 있다. 스페인 남부 무르시아 지역은 도시 하수를 처리해 연간 1억㎥ 이상의 재생수를 농업에 공급하고 있으며,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에서는 '지하수 리플레니시먼트(GWRS)' 프로젝트를 통해 정화수를 다시 지하 대수층에 주입해 지역 수급 안정성을 확보한다.
물 위기 해법 '화학'…저비용·저에너지로 양질의 물 확보
그러나 물은 단순한 확보만의 문제가 아닌, 누가 더 많이 쓰고, 누가 비용을 더 부담할 것인가라는 정의의 문제도 뒤따른다. 대규모 산업과 도시 단지는 자체적으로 수처리와 재활용을 감당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지역은 공공 인프라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때 등장하는 해법이 모듈형 분산 수처리 시스템이다. 산업단지와 기업이 자체적으로 정수·재활용 설비를 갖추는 방식인데, 전력 부문에서 전용 발전소를 두는 것과 비슷하다. 실제로 미국 텍사스에서는 석유·화학 공장 단지에 모듈형 설비를 달아 자체 수급 체계를 구축하고 있고, 유럽의 식품·음료 산업단지에서도 지역 상수도망에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안정적 수급을 확보하기 위해 모듈형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다.
여기서 '화학'이 전면에 나선다. 고분자 복합 막과 그래핀을 이용한 '나노여과막'은 기존 역삼투 방식보다 에너지 소모를 크게 줄여, 싱가포르의 '뉴워터(NEWater)' 프로젝트 같은 초대형 재생수 플랜트에 채택되고 있다. 네덜란드와 스위스에서는 제올라이트 촉매를 활용해 수질에서 암모늄과 중금속을 제거하는 실증이 진행 중이고, 일본은 이산화티타늄 광촉매로 의약품 잔류물을 분해하는 데 성공했다. 금속-유기구조체(MOF) 같은 신소재 흡착 기술도 빠르게 발전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있다. 화학이 물 문제 해결의 중심으로 다시 소환되고 있는 셈이다.
공기 속 탄소, '건축 자재와 화학 원료'로 재탄생
기후 위기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대기 중 이산화탄소(CO₂) 농도 상승이다. 블루 케미스트리의 두 번째 축이 바로 이 CO₂를 화학적 반응으로 흡수·전환해 새로운 자원으로 바꾸는 것이다.
접근 방식은 크게 '광물화(mineralization)'와 '유기화학 원료화'로 나뉜다. 알칼리성 광물을 활용해 바닷물 속 CO₂ 흡수를 촉진하거나, 전기분해로 생성된 알칼리 용액을 해양에 투입하는 방식이 광물화다.
미국 스타트업 이쿼틱은 전기분해로 알칼리성 물질을 만든 뒤 해양에 투입하는 기술을 시험 중이고, 캐나다의 플래니터리 테크놀로지스는 폐광산에서 얻은 부산물을 활용해 실증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육상에서도 유사한 시도가 이어진다. 미국 스타트업 카본큐어는 콘크리트 제조 과정에서 배출되는 CO₂를 건축자재에 주입해 자재 강도를 높이고 온실가스 배출도 줄였고, 블루플래닛은 발전소의 CO₂를 포집해 만든 탄산염 기반 골재를 2016년 샌프란시스코 공항 신축 공사에 실제로 사용했다.
또 다른 접근은 CO₂를 화학 원료로 삼는 것이다. 독일의 화학기업은 이산화탄소를 원료로 폴리우레탄을 합성해 가구와 단열재를 만들고 있으며, 아이슬란드 기업은 수소와 CO₂를 결합해 메탄올을 생산하는 기술을 상용화했다. 이런 흐름은 단순한 배출 저감이 아니라, "탄소를 자원으로 바꾼다"는 새로운 산업 논리를 만들고 있다. 다만 이 과정에서도 비용, 에너지 효율, 사회적 수용성은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다.
생존 최적화된 생물의 진화, '화학으로 재현하기'
블루 케미스트리의 세 번째 축은 생물이 진화 과정에서 확보한 화학적 메커니즘을 빌려 기후 적응에 활용하는 것이다. 수십억 년 동안 혹독한 환경 변화를 거쳐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생물 종들은 그 과정을 통해 주어진 환경에 최적화된 존재다. 과학자들은 이런 생물 종에서 진화를 위한 최적의 아이디어를 빌리고자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조류와 박테리아의 대사 경로 활용이다. 미세조류는 광합성으로 CO₂를 흡수해 다당류와 지질을 합성하는데, 이를 화학 공정과 결합하면 탄소 격리와 동시에 바이오연료·바이오 플라스틱 생산이 가능하다. 실제로 미국 에너지부(DOE)는 해양 미세조류를 활용한 탄소 격리 프로젝트를 지원하고 있으며, 유럽과 한국에서도 대규모 배양 실험이 이어지고 있다.
토양 속 박테리아가 수행해온 질소 고정이나 금속 환원 기능 역시 화학적 촉매와 결합해 폐수 정화나 오염 물질 안정화 기술로 확장되고 있다. 미국 로렌스버클리국립연구소는 금속 환원 박테리아의 대사 경로를 모사한 촉매 공정을 개발, 폐수 속 우라늄과 카드뮴을 안정화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생물이 증명한 효율성을 화학적으로 재현, 에너지 소비와 탄소 배출을 줄여 기후 적응에 필요한 성과를 내고 있는 것이다.
"자연과 공존하는 지속가능성 고려돼야"
이처럼 블루 케미스트리는 물, 탄소, 생물이라는 세 가지 축을 통해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새로운 경로를 제시한다.
지구공학은 '통제 불가능한 기술'에 대한 경고이면서, 과연 우리는 지구를 인위적으로 조작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겠냐는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블루 케미스트리는 이 질문에 대한 새로운 해답이다. 자연에 맞서 싸우기보다, 자연의 원리를 이해하고 그 지혜를 활용해 공존하자는 것이다.
물의 재활용과 수자원 관리, 이산화탄소 자원화, 생물·화학 융합 접근은 모두 기후 적응에 필요한 현실적 경로다. 특히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화학·소재 산업 기반을 갖춘 한국은 이 분야에서 선도적 역할을 모색할 수 있다. 이정현 한국해양과학기술원 해양생명공학연구센터 박사는 "블루 케미스트리는 지구 자원에 화학과 공학을 접목해 새로운 생산물을 만드는 개념이며, 지속가능한 미래로 가는 길이 될 수 있다"면서 "다만, 연구와 산업 적용 과정에서 자연과 공존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자원 개발이 핵심적으로 고려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종화 기자 justi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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