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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다이어리]영주권자도 불안한 美 국경 장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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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검열 강화·반이민 정서 강세
재정·가계 악화에 관용정신 상실
극단적 조치 반복…국가 신뢰 기로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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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미국 영주권자라도 웬만하면 국경을 넘지 말라는 말이 나옵니다."


최근 만난 한 외교 당국자의 말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반(反)이민 정책으로 국경 단속이 강화되면서 가볍게 국경을 넘다 예상치 못한 상황을 겪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나이아가라 관광 중 도보로 미국에서 캐나다로 넘어갔던 영주권자 중 벌금 같은 경미한 전과 때문에 미국 재입국이 거절된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니 1년 전 일이 떠올랐다. 뉴욕에서 차로 8시간을 운전해 캐나다 토론토에 사는 친척을 만나러 가던 길, 캐나다 국경 심사에서 아이의 구여권을 챙기지 못한 사실을 알았다. 새 여권에는 미국 비자가 없었다. 캐나다 입국은 가능했지만, 미국 재입국은 원칙상 불가능했다. 미국으로 되돌아가려던 순간 캐나다 측 출입국 심사관이 "미국 측 책임자에게 얘기해 두겠다"며 여행을 권했다. 고민 끝에 캐나다로 들어가 며칠간 머물렀고, 이후 아무 문제 없이 미국에 입국했다. 요즘 같은 분위기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트럼프 2기 출범 후 불법 이민 단속이 전방위로 확산 중이다. 불법 이민자 연간 100만명 추방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이민 당국이 무리한 단속에 나서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불똥은 한국에도 튀었다. 지난 4일 미 이민 당국은 조지아주의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합작 공장을 급습해 취업 활동이 금지된 전자여행허가(ESTA)나 단기 상용 비자(B-1)로 근무하던 한국인 300여명을 체포했다. 미국의 투자 요청에 따라 공장을 세웠지만 필요한 인력에 대한 비자 발급이 원활하지 않아 편법을 동원한 것이 단속의 빌미가 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후 비자 절차 개선을 시사했지만 "한국 기업이 와도 자국민만 고용한다"며 이번 단속을 지지하는 여론도 적지 않다. 미국 사회에 팽배한 반이민 정서와 무관치 않다.


'이민자의 나라' 미국의 배타적 변화에는 먹고사는 문제가 자리한다. 값싼 노동력 공급과 소비 확대, 인재 유입과 혁신, 인구 구조 안정이라는 이민의 수많은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국가 재정 악화와 가계의 어려움이 겹치면서 미국을 지탱해 온 '관용'은 힘을 잃었다. 특히 중산층 이하 백인 노동자들에게 외국인은 더 이상 기회의 동반자가 아닌, 일자리와 복지를 두고 다퉈야 할 경쟁자다. 이젠 불법 체류자뿐만 아니라 합법 체류자, 심지어 영주권자조차 의심과 검열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런 반이민 정서는 트럼프 지지층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최근 모닝컨설트 조사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46%지만 그의 이민 정책 지지율은 49%로 더 높게 나타났다. 내년 중간선거를 앞두고 트럼프 대통령이 지지층 결집을 위해 반이민 정책을 더 강화할 가능성이 큰 이유다. 심지어 이민 유화책을 폈던 조 바이든 전 대통령조차 임기 말 국경 장벽을 높이며 보수적 기조로 선회했다.


미국은 더 이상 관용의 제국이라 부르기 어렵다. 자국 우선주의 아래 국경은 높아지고, 외국인을 향한 시선은 점점 날카로워지고 있다. 다양성과 개방, 포용의 가치는 지난 수십 년간 미국이 세계를 이끌어 온 소프트파워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배타적 정책은 기업과 인재를 내쫓고, 조지아 공장 급습과 같은 극단적 조치는 미국을 '신뢰하기 어려운 나라'로 만들고 있다. 트럼프 2기 출범 8개월여가 지난 시점 배타주의로 급격히 기운 미국의 모습은 1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나라처럼 느껴진다. 관세보다 더 큰 부메랑은 반이민 정책일지 모른다. 지금의 흐름은 단순한 이민 정책의 변화가 아니다. 미국이 세계 리더로서 소프트파워를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영영 상실할 것인지를 가르는 기로일 수 있다.





뉴욕=권해영 특파원 rogueh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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