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부 감정평가 직원, 외부 감평법인 상대로
강의 진행 후 강의료 수취
내규 및 윤리강령 위반 소지
감평업계선 "갑을관계 이용 의심"
수수료 안받는 탁상감정 이용 관행 여전
본부 집중된 감정평가 권한 일키웠단 지적도
감정평가법인을 상대로 한 은행의 불공정 관행이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은행이 원하는 담보물 가격을 받기 위해 여러 법인에 감정 반복 의뢰부터 무상 탁상감정 요구까지 관행이 여전하다는 지적이다. 최근에는 은행 감정평가 담당 직원이 외부 법인을 상대로 강의를 하고 강의료를 받은 사실까지 드러나 논란을 키웠다. 업계에선 은행과 법인 간 뿌리 깊은 '갑을관계' 탓에 거절이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과거 영업점이 감평법인에 리베이트를 받는 관행을 없애기 위해 본부에 감정평가 권한을 집중한 현재 시스템이 역부족이란 비판도 제기된다.
4일 금융업계에 따르면 한 시중은행의 기업여신심사부 A팀장은 2023년부터 지난해까지 감정평가법인을 상대로 다섯 차례 안팎의 강의를 진행했다. 강의료는 건당 100만원이었으며, 강의 내용은 담보평가 방법과 심사 과정이었다. 그러나 이는 해당 은행의 내규와 윤리강령을 위반한 행위로 보인다. 내규 6조(타업종사와 겸직금지)를 보면 직원은 은행의 허가 없이 업무 외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다른 업무에 종사하거나 다른 직무를 겸직해선 안 된다. 이는 징계 대상에 해당할 수 있다. 내규 13조 4호에 따르면 거래처 또는 직원 간 사적 금전대차 등 비정상적인 거래 또는 영리 행위와 겸직금지를 위반한 경우 은행에서 직원을 징계한다. 윤리강령 20조에 따라 이해가 상충하는 행위를 하지 않으며 사전승인 없이 타 업무를 겸직하지 않아야 하며 23조에도 업무와 관련해 금액의 다과를 불문하고 리베이트 또는 금품을 요구하거나 받아선 안 된다고 명시돼있다.
강의료 수취 사실이 드러난 이후 A팀장은 '리뷰업무'에서만 배제됐을 뿐, 내부 결재과정에서 중간결재자 역할 등 관련 업무를 그대로 수행하고 있다. 리뷰업무란 감평법인을 평가하고 등급을 매겨 이에 맞게 차등으로 의뢰를 배정하는 일을 말한다. 다만 은행에서 징계 절차가 이뤄지면서 추후 같은 부서 내 다른 팀으로 이동할 것으로 전해졌다.
A팀장이 법인들에 강의하게 해달라 요구했는지 명확지 않으나, 은행이 감평법인에 평가를 의뢰하는 만큼 요구를 했다면 거절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게 업계 의견이다. 대출 과정에서 담보물을 평가할 때 외부 감평법인에 맡겨 평가를 진행한다. 감평법인이 은행이 담보물 평가를 할 때 감정평가를 마치고 관련 문서를 은행에 발송하면, 은행은 내부 규정에 따라 가격의 적절성 여부를 검토하는 과정을 거친다. A팀장은 담보물 감정평가 가격을 검토하는 책임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한 중소 감정평가법인 관계자는 "은행에서 담보물 감정평가 가격을 검토하는 책임자는 외부 감평법인에겐 절대적인 '갑'이다"며 "내부에 여러 감평법인의 평가 가격을 보고 공정하게 결정하는 시스템이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원하는 평가 가격이 나올 때까지 '반복 의뢰'를 하는 관행도 있는 마당에 이들의 요구를 거절하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은행이 감정평가법인에 담보물평가를 의뢰하는 관계로 형성되는 여러 불공정 관행은 쉽게 고쳐지지 않고 있다. 은행은 담보물 감정평가를 위해 감평법인을 무작위로 선정한다. 은행은 담보물 감정가가 높게 나와야 안정적으로 대출을 실행할 수 있기 때문에 은행이 원하는 감정가가 존재한다. 따라서 감평법인들이 감정가를 제시했을 때 은행이 원하는 가격이 아니라면, 다시 무작위로 다른 감평법인에 감정을 맡기는 등 원하는 감정가를 얻을 때까지 이른바 '반복 의뢰'를 하는 것이다.
여기에 탁상감정(탁상자문) 문제도 여전하다. 정식 감정평가 이전에 은행이 감정평가사나 법인에 평가액을 가늠하는 사전 평가 절차다. 탁상감정을 통해 은행이 정보를 받고는 본계약을 하지 않는 식으로 수수료를 내지 않던 관행이 있다. 이를 막고자 2020년 국토교통부가 '감정평가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개선방안'을 발표했지만, 여전히 은행이 감평사나 법인에 탁상감정 수수료를 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정식 감정서를 은행에 제출해도 대출이 실행되지 않으면 수수료를 주지 않는 경우도 여전하다.
은행 본부에 집중된 감정평가 권한이 일을 키웠다는 지적도 있다. 과거 은행 영업점이 외부 감평법인으로부터 리베이트를 받고 이로 인한 부실대출이 일어나는 등 부작용을 막기 위해 영업점에서 감정평가 법인 지정 권한을 가지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후 각 은행 본부로 해당 권한이 넘어가면서 소수의 인원이 권한을 행사하게 된 게 현재의 은행 감정평가 시스템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감평법인에 페널티를 주면 '포인트'들이 쌓여서 수수료를 많이 받을 수 있는 높은 감정가 물건을 감평법인들이 취급하지 못하게 된다"며 "전국에서 몰리는 감정평가서들이 본부에 집중되면 감평법인 입장에서 (관련 업무를 하는 사람은) 이들에게 절대적 '갑'이 된다"고 지적했다.
오규민 기자 moh011@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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