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국 만장일치 원칙에 일본이 사실상 '문지기' 역할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 금지 해제 요구 가능성 높아
경제적 기회와 정치·외교적 비용 사이서 줄타기
정부가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 결정을 내리면 일본의 동의 여부가 최대 변수가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CPTPP 신규 가입은 기존 회원국 11개국의 만장일치 승인이 전제 조건인데, 일본이 사실상 '게이트키퍼'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의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 규제가 협상 테이블에서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4일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우리 정부는 CPTPP 가입 추진을 통해 아시아·태평양 지역 교역 네트워크를 확대하고, 공급망을 다변화해 글로벌 무역질서 재편에 대응한다는 전략이다. CPTPP는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13%, 교역량의 15%를 차지하는 거대 시장이다. 미국이 빠져 있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개방적인 무역협정으로 꼽히며, 고도의 통상 규범과 높은 수준의 시장 개방을 특징으로 한다.
CPTPP 가입이 가져올 경제적 효과는 분명하다. 한국이 가입할 경우 회원국 간 평균 95% 수준의 관세 철폐 혜택을 받을 수 있고, 멕시코와 같은 자유무역협정(FTA) 미체결국과의 시장 접근성이 크게 개선된다. 반도체·자동차·배터리 등 주력 산업의 수출 저변을 넓히는 동시에 중국에 치우친 무역 구조를 완화하는 데도 기여할 수 있다.
CPTPP 가입에 가장 큰 걸림돌은 일본의 입장이다. 협정은 만장일치제가 원칙이어서 어느 한 나라라도 반대하면 가입이 불가능하다. 일본은 협정 발효국 가운데 가장 큰 경제 규모를 차지하며 사실상 신규 가입의 문지기 역할을 해왔고, 그 과정에서 가입 신청국에 늘 식품안전 규제 철폐를 요구해왔다.
실제로 2022년 G7 정상회의에서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만나 후쿠시마 등 인근 9개 현의 버섯류 등 23개 품목에 대해 방사성 물질 검사 증명서를 요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이를 계기로 영국은 후쿠시마산 식품 수입 규제를 철폐했다. 이 조치 이후 영국의 CPTPP 가입은 순조롭게 진행돼 2023년 3월 말 회원국들이 정식 가입을 승인했다. 일본의 요구 수용이 사실상 가입 성사의 열쇠였다는 평가다.
현재 CPTPP 가입을 추진 중인 대만도 후쿠시마 식품 수입 규제 전면 해제를 선언하며 일본의 동의를 얻어내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와 달리 한국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여전히 8개 현에서 생산된 수산물의 수입을 금지하고 있다. 일본이 CPTPP 가입 심사 과정에서 이 문제를 집요하게 제기할 경우 협상이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공교롭게도 지난달 조현 외교부 장관이 고이즈미 신지로 일본 농림수산상을 만났을 때도 일본은 후쿠시마산 수산물 수입 규제 해제를 공식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정부로서는 딜레마다. 만약 일본의 요구를 수용해 수입 규제를 풀면 국내 여론의 거센 반발에 직면할 수 있다.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 논란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소비자 안전 우려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규제를 유지한 채 가입 신청을 강행했다가 일본의 반대로 거절당하면, 선진국으로서 외교적 체면을 구기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여기에 농산물 시장 개방이라는 또 다른 난제가 있다. CPTPP는 기존 자유무역협정보다 농업 분야 개방 수준이 훨씬 높다. 특히 쌀과 축산물 등 민감 품목을 어떻게 지켜낼지가 관건이다. 국내 농업계는 CPTPP 가입이 본격화될 경우 '제2의 FTA 파고'가 밀려올 것이라며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이미 한미 FTA 체결 당시에도 농산물 피해 보전과 폐업 지원에 막대한 재정이 투입됐는데, CPTPP는 그보다 개방 폭이 더 크다는 점에서 우려가 크다.
일본 변수와 농업 개방이라는 이중 과제를 어떻게 풀어내느냐가 한국 통상 전략의 성패를 좌우할 전망이다. 일단 정부는 당분간 CPTPP 가입 추진 속도를 조절하면서 일본과의 대화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산업부 관계자는 "아직 가입 신청 시기를 확정한 것은 아니며, 국내 이해관계자와 충분히 협의해 나갈 계획"이라며 "일본을 비롯한 회원국과 긴밀히 협의해 우리 기업의 피해가 최소화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세종=강나훔 기자 nahu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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