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위 '플랫폼 대리인지정제도' 국회 계류
e커머스 업체들 책임 강화 법안도 봇물
브랜드사들 "환영"… e커머스 "무리수"
국경을 초월한 온라인 위조품 시장을 근절하기 위해 추진 중인 제도 개선이 줄줄이 제동이 걸렸다. 최근 수년간 가품 판매의 중심으로 부상한 e커머스 플랫폼에 대한 책임을 강화하는 입법이 추진됐지만 해외 통신 판매자에 대한 대리인 의무 지정제도 등 정부의 핵심 대책부터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정책을 앞세운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압박에 직면한 탓이다.
한국 시장 확대에 나선 알리익스프레스와 테무 등 중국 e커머스(C커머스)를 겨냥해 위조품 판매 중개 플랫폼에 연대 책임을 묻는 법안들도 쏟아졌지만 여전히 국회에서 계류 중이다. 산업계에서는 가품이 유통되는 e커머스 플랫폼이 신속한 차단을 의무화한 상표법 개정이 시급하다고 촉구하고 있다.
국회서 잠자는 '국내 대리인 지정제도' 법안
12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해 8월 제출한 전자상거래법 개정안은 지난해 12월 국회 정무위원회 2법안심사 소위원회에 상정된 뒤 현재까지 한 차례도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개정안은 해외 판매업자의 국내 대리인 지정 제도 도입이 골자다. 대리인 지정 제도는 국내에 주소와 영업소가 없는 해외 e커머스 플랫폼이 국내에 대리인을 지정해 소비자 불만이나 분쟁의 해결을 위해 필요한 조치를 강제하고, 위반할 경우 1000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알리·테무·쉬인 등 해외 e커머스 업체들이 대상자다.
공정위는 대리인 지정 제도가 시행되면 해외 플랫폼 거래에서 발생하는 분쟁이나 소비자 피해 등에 대해 적극적인 피해 구제와 원활한 조사가 이뤄질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동안 해외 e커머스 플랫폼은 미흡한 소비자 보호 정책으로 인해 해마다 피해 접수 건수가 늘고 있다.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국제거래 소비자 상담 접수 건수는 지난해 기준 2만2816건으로 전년(1만9418건) 대비 18%가량 늘었다. 2021년 기준 1만4000건에서 2배가량 급증한 수준이다.
지난해 12월3일 열린 국회 정부위 법안심사소위에선 당시 여당이던 국민의힘이 대리인 지정제도를 원포인트로 처리하자고 요구했지만,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전자상거래법 전부 개정안의 일괄 처리를 주장하면서 논의가 보류됐다. 올해 2월 열린 법안심사소위에서도 구체적인 논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미국이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세계 각국과 관세 전쟁을 시작한 것도 해당 법안 처리에 발목을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제출한 개정안에 대한 검토보고서에 따르면 주한미국상공회의소(암참)는 이번 개정안이 국내 대리인에게 단순한 절차적 의무를 넘어 통신판매자나 통신판매중개자로서 실질적인 의무 이행을 대리하도록 규정하고 있어 해외사업자가 국내에 실질적인 영업조직을 설치하도록 사실상 강제하고 있다며 반대 입장을 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른 '현지 주재 의무 금지 원칙'을 위반할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한미 FTA 제12조 5항은 '어떠한 당사국도, 국경 간 서비스 공급의 조건으로서 다른 쪽 당사국의 서비스 공급자에게 자국 영역에서 대표사무소 또는 어떠한 형태의 기업을 설립 또는 유지하도록 요구하거나 거주자이어야 한다고 요구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e커머스 업체 책임 강화법 쏟아져
국회에서는 국내 대리인 지정 제도를 포함해 위조품 판매에 대한 e커머스 플랫폼들의 책임 강화 내용을 담은 법안들도 다수 제출됐다.
22대 국회 들어 가품 상품 유통 관련해 'e커머스 업체의 책임 강화'안을 담은 전자상거래법 개정안은 7건이나 발의됐고, 상표법을 통해 e커머스 업체들이 위조상품 판매 예방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하는 개정안도 3건이 나왔다.
추경호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달 C2C(소비자간거래)에서 통신판매중개업자인 e커머스 플랫폼이 신원확인, 분쟁 협조, 소비자 알림 의무를 갖는 전자상거래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위조품이 플랫폼에 입점한 개인 판매자를 통해 유통되더라도 플랫폼은 관리, 감독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송재봉 민주당 의원도 전자상거래법 개정안을 통해 e커머스 플랫폼에 위조상품 판매 모니터링 등의 의무를 부여했고, 판매자의 기만행위로 소비자가 손해를 입었을 때 e커머스 플랫폼이 연대 배상해야 한다는 내용도 담았다. 의원실 관계자는 "티몬·위메프(티메프) 사태 이후 전자상거래법 개정의 필요성이 커진 상황에서 e커머스 관련 소비자 피해를 줄여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였다"며 "그동안 자율규제에 맡겨온 측면이 커 소비자 보호를 위해서는 법제화가 필요하다고 봤다"고 말했다.
이철규 국민의힘 의원과 김정호 민주당 의원 등은 상표법 개정안을 통해 e커머스 플랫폼을 온라인서비스제공자로 규정해 상표권 침해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하는 내용을 담았다. 상표권 등에 대한 권리 보호를 강화하기 위해서다. 법안은 오픈마켓 운영자에 대해 상표권 침해 게시물의 불법성이 명백하고, 피해자로부터 삭제와 차단 요구를 받거나, 외관상 게시물 존재를 인식할 수 있다는 점이 명백할 경우 상품을 판매하지 못하도록 하는 대법원(2012년) 판례를 기반으로 했다.
e커머스 플랫폼 업계는 과도한 규제라고 반발하고 있다. 짝퉁 근절을 위해 자체 인공지능(AI) 시스템을 활용해 모니터링을 강화하고 있으며 짝퉁 제품을 유통한 판매자에 대해도 판매 정지 등의 적극적인 조치 중인데, 방대한 위조품을 근절하는 것은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e커머스 관계자는 "AI를 365일, 24시간 가동하며 가품을 막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있지만, 가품 판매자들은 다른 사업자등록증을 받아 또 플랫폼에 들어온다"며 "소수의 가품 판매자들로 인해 플랫폼에 연대 책임을 요구한다면 사업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K브랜드사들은 e커머스 플랫폼의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특히 중소 K브랜드까지 e커머스를 통해 위조품이 유통되고 있어 적극적인 조치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브랜드사 관계자는 "가품을 모니터링하는 것은 e커머스 플랫폼이 당연히 해야 할 역할"이라며 "판매자에 대한 정보도 확보한 곳이기 때문에 가품으로 인해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소비자와 브랜드사가 바로 해결하고 조치할 수 있도록 강화된 책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짝퉁의 공습 끝>
이민지 기자 min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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