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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격 앞둔 전우는 죽고 싶지 않다고 했다"…日 98세 가미카제 생존자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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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공대원 출신 98세 일본 남성 전쟁 참상증언
생존자들에 결례 생각…아흔 넘어서 증언
"다들 죽고 싶지 않다고 했다…어리석은 짓이었다"

서울 탑골공원 앞에서 열린 일본 정부 규탄대회 모습. 기사 내용과 무관. 아시아경제DB

서울 탑골공원 앞에서 열린 일본 정부 규탄대회 모습. 기사 내용과 무관. 아시아경제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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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참상을 꾸준히 증언해온 98세의 전 일본 가미카제 특공대원이 출격 직전 "죽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하고 전사한 전우를 떠올리며 뒤늦은 진실 알리기에 나서 화제다.


1일 일본 마이니치신문은 사가시에 거주하는 98세의 토리야 쿠니타케씨의 스토리를 보도했다. 토리야씨가 사람들 앞에서 직접 증언을 시작한 것은 90세 전후 무렵이었다. 같은 비행학교 동기생이 80대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가미카제를 기치로 목숨을 바친 전우들에게 실례라며 그들의 진심을 밝히기 어려워서다.

토리야 씨는 2025년 4월 전후 80년을 맞아 후쿠오카현 다치아라이 평화기념관에서 120명을 대상으로 강연했다. 그는 16세에 다치아라이 육군비행학교에 입교해 소년 비행병이 됐으며 1945년 봄에는 만주에서 특공대 '제453 신무대' 편입 명령을 받았다. 출격 명령을 기다리던 중 종전을 맞았고, 이후 1년 7개월간 시베리아에 억류됐다.


그와 가까웠던 동기는 1945년 5월, 특공 출격 명령을 받자 "죽고 싶지 않다"를 거듭 말했다. 목숨을 건 혹독한 전투기 훈련을 견뎌낸 이유는 본래 적기와의 공중전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서였다. 그는 "한 번의 돌격으로 성공할지 알 수 없는데, 안고 싶지도 않은 폭탄을 안고 가는 건 어리석고 아깝다"라는 대화를 나누곤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출격 후 오키나와 인근에서 전사했다.


마이니치 기자와 대화에서 토리야 씨는 오랜 세월 증언을 주저한 이유로 사가현 출신의 동기생과의 갈등을 들었다. 그의 동기는 가고시마현 지란 비행장에서 두 차례 출격했지만, 기체 파손과 불시착으로 두 번 모두 살아남았다. 토리야 씨는 "모두가 기꺼이 자원해 목숨을 바친 건 아니었다. 진실을 후세에 남기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기는 "그건 잘못이다. 이제 와서 파헤쳐 말하거나 글로 남기는 건 특공대원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실례"라며 단호히 반대했다. 두 사람은 자주 언쟁을 벌였다고 한다.

토리야 씨는 "특공에서 살아남은 자의 고통을 생각하면, 한 번도 출격하지 않은 내가 감히 말할 처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며 "동기가 생존해 있는 동안은 입을 열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그러나 "특공에는 겉과 속이 있다"고 말한다. 유서에 적힌 '나라를 지키겠다'는 결의는 대부분 형식적인 것이었다. 자신 역시 빈 종이에 손톱과 머리카락을 동봉해 부모에게 보냈는데, 검열을 의식했기에 "죽기 싫다, 살고 싶다"는 진심을 쓸 수는 없었다. 토리야 씨는 마이니치에 "전쟁은 참혹한 죽음을 강요한다. 적군도 아군도 부모와 형제가 있는데, 원한도 없는 이들을 죽여야 한다. 위에 선 사람들이 그 책임이 얼마나 큰지 뼈저리게 자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경호 기자 gungh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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