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메이커의 사전적인 의미는 마라톤이나 자전거 경주 등에서 기준이 되는 속도를 만드는 선수다. 기록 종목에서 페이스메이커 역할은 중요하다. 초반부터 일정한 페이스를 유지해 주면서, 안정적인 경기력을 확보하도록 도와주는 조력자다.
홀로 선두를 질주하는 상황이 계속되면 페이스를 유지하기 쉽지 않다. 마음이 느슨해질 수 있고, 거꾸로 마음만 급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자기가 잘하고 있는지, 아닌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오버페이스 때문에 경기 자체를 망칠 때도 있다. 그럴 때 자극제가 되거나 기준점이 되는 인물이 곁에서 동행한다면 얼마나 든든한가. 페이스메이커라는 의미를, 특정인을 위한 희생자 정도로 축소할 필요는 없다. 공동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힘을 모으는 동료라는 의미도 녹아 있다.
다른 종목과 마찬가지로 바둑도 페이스메이커는 필요하다. 한국 여자바둑은 그동안 여제(女帝) 최정 9단의 독주 체제가 이어졌다. 세계 바둑 랭킹을 집계하는 '고레이팅'에 따르면 최정은 2017년부터 2025년까지 여자 프로바둑 세계 1위를 질주했다.
10년에 가까운 세월, 중국 선수들의 도전을 이겨내고, 한국 여자 바둑의 수문장 역할을 했다. 하지만 세월의 무게는 어찌할 수 없나 보다. 1996년 10월생으로 만 28세인 최정. 아직은 한창인 나이처럼 보이지만, 바둑계의 달라진 풍토를 고려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인공지능(AI) 시대에 들어서면서 경륜 있는 바둑 기사들은 신예들의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 10대 후반부터 20대 초중반까지를 바둑 기사의 전성기로 보기도 한다. 여자 바둑의 다크호스로 떠오른 일본기원 출신 스미레 4단은 2009년 3월생이다.
스미레보다 두 살 많지만, 최정보다는 열 살 이상 어린 김은지 9단은 2007년 5월생이다. 한국기원에 따르면 8월 현재 국내 여자바둑 랭킹 1위는 김은지다. 실제로 최정과 김은지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1위 자리를 놓고 경쟁하고 있다.
한국 바둑계가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이유는 오랜 세월 기다렸던, 페이스메이커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최정 혼자서 외로운 레이스를 펼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다행인가. 김은지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최정이 자기의 페이스메이커가 될 수도 있다.
정치에서도 최정과 김은지처럼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동반자는 필요하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25일(현지시간) 한미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평화를 만드는 피스메이커가 되면, 저는 페이스메이커가 되겠다"는 발언으로 화제가 됐다. 상대에 관한 기대와 존중을 담은 덕담 한마디는 경직된 정상회담 분위기를 일순간 훈풍으로 바꿔 놓았다.
국익을 놓고 벌이는 협상 공간에서는 탄탄한 논리보다 상대 감성을 파고드는 말 한마디가 더 큰 효과를 발휘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비즈니스 마인드로 무장한 초강대국 수장의 마음을 열게 했다면, 국익의 관점에서는 금액으로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의 긍정 효과를 이미 안겨줬는지도 모른다.
류정민 정치부장 jmry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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