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한류 약진 속 전통의 부재
민족 자긍심 강화 위한 관심· 투자를
지난 몇 년간 K-컬쳐의 약진이 눈부시다. K-pop에서 비롯된 열기가 K-영화, K-드라마로 이어지더니 지난해 소설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K-문화가 바야흐로 세계의 중심적 문화의 핵심으로 진입하는 기대를 가지게 된다. 올해에는 우리나라의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 엔딩Maybe Happy Ending'(박천휴 작·작사, 윌 에런슨Will Aronson 작·작곡)이 미국 토니상 대상을 수상했을 뿐 아니라, 케이팝을 중심으로 한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K-Pop Demon Hunters' 소식도 뜨겁다. 면적으로나 인구수로 보나 하나의 작은 나라에 불과한 우리나라의 저력은 과연 무엇일까? 우수한 DNA로부터 물려받은 각 개인의 재능과 한국민 특유의 끈기라는 답이 곧 떠오른다.
지난여름, 미국 북중부를 모처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1983년 처음 유학 당시 왜소한 체구에 어눌한 영어로 잔뜩 주눅 들었던 때와는 달리 모든 면에서 여유롭고 당당하게 일정을 소화할 수 있었다. 여정 중 뉴욕주 로체스터시에서 잠깐의 짬을 내어 메모리얼 아트 갤러리(Memorial Art Gallery)를 방문하게 되었다. 큰 기대 없이 들렀던 미술관은 고대로부터 현대, 그리고 아프리카로부터 극동 및 북미와 남미 원주민들의 문화에 이르기까지의 파노라마 적 전시로서 동서고금의 미술을 아우르고 있었다.
방학 중인 아이들의 무리가 와글와글 활기를 더하는 미술관에서, 오늘의 미국 사회 외에 다양한 시간과 공간에 속하는 '타자'에 대하여 한껏 열린 시각이 관통하고 있는 전시에 박수를 보낼 수 있었다. 미술관을 나서려는 순간 출구 부근 전시실 한켠의 작은 공간이 눈길을 끌었다. 입구의 작은 팻말에는 일본 영상 작가 히라키 사와Hiraki Sawa의 이름과 /home이라는 전시 제목이 적혀있었다. 작가가 기억 속에 늘 그리던 고향 집 곳곳의 공간을 작은 비행기 및 비행기 무리가 종횡무진 누비며 비행하는 정감 어린 싱글 채널 비디오 영상이었다. 미술관의 동아시아 전시실에 속한 그 공간을 벗어나며 다시금 꼼꼼이 둘러보니 그 전시실에는 중국과 일본의 유품들만 가득하였지 우리나라의 유품은 단 한 점도 진열되어있지 않았다!
여정 동안 팽팽하였던 나의 국가적 자존심이 안타깝게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로체스터시에는 나의 조카 두 명이 미국 여성들과 결혼하여 거주하고 있다. 그리고 큰 조카는 이제 생후 7개월에 접어든 아들을 두고 있다. 이번 방문길에 소위 가문의 대를 이어갈 아가의 이름을 족보에 올려서 가져다 달라 하여 막 전달을 한 터였다. 한국 가문의 족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우리 아가가 자라서 박물관을 방문한다면 자신이 피를 물려받은 한국이 이처럼 부재하는 동아시아 전시실에서 어떠한 생각을 하게 될까? 세계 문화계의 화려한 조명을 받는 우리 K-문화의 약진 이면에서, 우리의 문화적 자긍심을 꾸준히 쌓아가려면 아직 멀었다는 자조감으로 발길이 무거웠다. 소나기처럼 세계를 적시는 대중문화의 수면 아래에서 샘 깊은 물이 되어줄 순수 문화와 오랜 역사의 단아하고 신명 나는 전통문화에 대한 다양하고 치밀한 관심과 투자 및 홍보전략이 절실하지 않은가.
이화원 (한국연극평론가협회 회장, 경계없는예술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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