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굴꾼을 공사판 작업반장처럼 연기
"일상 연장선의 악행이 더 큰 공포"
절제한 연기로 시대 거울 역할 수행
디즈니+ 시리즈 '파인'에서 오관석(류승룡)은 가난 때문에 범죄에 내몰린다. 처음엔 배를 곯지 않으려는 절박한 마음에 쌀, 간장 같은 생필품을 훔친다. 하지만 절도는 습관이 되고, 더 큰 범죄로 그를 인도한다.
류승룡은 오관석이 욕망에 빠지는 모습을 성실한 근로자로 그려냈다. 신안 앞바다에 잠든 도자기를 한 점이라도 더 건지려는 장면 등을 도굴꾼보다 공사판의 작업반장처럼 표현했다. 어선 위에서 단단한 얼굴과 묵직한 목소리로 동료들에게 일사불란한 팀워크를 요구한다. 수확이 좋은 동료에게 칭찬도 아끼지 않는다.
류승룡은 최근 아시아경제와 인터뷰에서 "오관석은 절대악(絶對惡)이 아니다. 그저 구르는 눈덩이처럼 욕망이 계속 불어나는 사람일 뿐"이라며 "그걸 드러내는 과정이 과장되거나 극악무도하게 표현되면 드라마의 주제 의식에 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파인'은 1970년대에 한국 사회가 품었던 욕망의 실체를 해부하는 작품이다. 근대화와 경제성장의 국가 프로젝트에 휩쓸려 개인의 욕망마저 하나로 수렴되던 시절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 최전선에 있는 오관석은 당시 많은 사람이 품었던 보편적 욕망을 발현하는 인물이다. 개인의 생존 본능이 욕망으로 치환되던 역사를 환기한다.
류승룡은 기꺼이 시대를 반영하는 장치가 됐다. 일상적인 얼굴과 절제된 표현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 돼 욕망의 흔적을 하나씩 담아냈다. 특히 가족을 위한다는 명분이 점차 자기합리화의 도구로 변질하는 과정에 많은 신경을 기울였다.
그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으로 나타나야 시청자에게 사실적으로 다가갈 것 같았다"며 "'나도 저런 상황이라면 저럴 수 있겠다'는 공감을 주는 것이 중요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그려진 악의 일상성은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언급한 개념인 '악의 평범성'을 연상케 한다. 상황에 순응하며 점진적으로 타락해가는 보통 사람의 모습이다.
대표적인 예는 오관석이 황선장(홍기준)과 함께 잠수해 있는 임전출(김성오)을 살해하는 장면. 이전까지 의기양양하던 얼굴은 온데간데없다. 임전출이 물 밖으로 나오자 어쩔 줄을 모르며 허둥거린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해머를 가져오지만, 황선장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기 바쁘다.
류승룡은 "투박한 행위로 현실감을 높이는 아이러니한 경험이었다"며 "때로는 악행을 극대화하기보다 일상의 연장선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방식이 시청자에게 더 큰 공포를 준다"고 말했다.
'평범한 악'은 경제적 불평등과 생존 경쟁이 심화한 오늘날에도 언제든 우리 곁에 나타날 수 있다. 류승룡의 절제된 연기는 결국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과연 우리는 오관석과 다른가?"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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