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국가 합류 변수 가능성
미개척 시장·지정학적 가치 부각
역사적 연결고리 활용 기회 잡아야
동남아시아는 오랫동안 10개국이 아세안(ASEAN)의 중심을 이루어 왔다. 하지만 다가오는 10월 쿠알라룸푸르 정상회의를 기점으로 이 구도가 바뀔 전망이다. 동티모르(티모르-레스트·Timor-Leste)가 11번째 정회원국으로 합류하기 때문이다. 2002년 독립 이후 줄곧 아세안 가입을 숙원으로 삼아온 동티모르는 2011년 공식 가입 신청을 거쳐 2022년 옵서버 자격을 얻었고, 2023년 가입 로드맵이 확정되었다.
이후 사실상 시기 문제만 남았는데, 올해 10월 말 말레이시아에서 최종 승인이 확정될 예정이다. 동남아 전체가 하나의 제도적 틀 안에 묶이는 역사적 순간이 다가온 셈이다. 동티모르의 합류는 아세안 내부 균형, 역외 강대국과의 관계, 나아가 한국 외교 전략에도 파급력을 미칠 전망이다.
불러올 파장
무엇보다 아세안 내부의 정치적 이질성이 확대된다.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 동쪽 끝자락의 소규모 저개발국이지만, 독립 이후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해 온 몇 안 되는 국가다. 군부 쿠데타 이후 혼돈에 빠진 미얀마, 권위주의 성향이 짙은 캄보디아·라오스 등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합의제로 운영되는 아세안이니만큼 젊고 민주적인 동티모르의 합류는 새로운 갈등 요인이 될 수 있다. 특히 미얀마 사태 대응에서 동티모르가 강경한 목소리를 낼 경우 내부 균열이 더욱 두드러질 수 있다.
경제적으로는 부담과 기회가 교차한다. 동티모르는 아세안 전체 GDP의 0.1%에도 미치지 못하는 최빈국이다. 도로·전력·통신 인프라가 취약하고, 국가 재정은 석유와 가스에 크게 의존한다. 따라서 아세안 공동체가 추진해 온 경제통합에 불균형 요인이 될 수 있다. 반면, 이 점이 역외 파트너들에겐 기회로 비칠 수 있다. 일본·호주·중국은 이미 동티모르 개발 협력에 적극적이며, '미개척 시장'으로서 투자 경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아세안은 역내 격차 확대라는 고민과 동시에 역외 자본 유치라는 이익을 함께 맞이하게 된다.
안보 측면에서도 동티모르는 지정학적 의미가 적지 않다. 호주와 인접한 인도양?태평양 교차점에 위치한 만큼, 미·중 전략 경쟁의 새로운 무대가 된다. 동티모르가 아세안 틀 안에서 '국제법 준수'를 강조한다면 남중국해 문제를 둘러싼 베트남·필리핀과 연대하며 중국의 반발을 자극할 수 있다. 동시에 호주와 미국은 동티모르를 통해 아세안과 인도-태평양 전략을 연결하는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다. 이는 아세안의 '전략적 자율성'을 시험하는 변수이자, 아세안이 남태평양까지 전략적 지평을 넓히는 계기가 된다. 특히 남태평양을 둘러싼 해양 질서 경쟁이 격화되는 현시점에서 동티모르의 존재감은 지역 안보 구도를 재편하는 촉매제 역할을 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에 다가온 기회
한국과 동티모르는 의외로 끈끈한 역사적 인연을 공유한다. 1999년 동티모르 독립 직후 유엔 평화유지군 파병에 나섰던 '상록수부대'는 한국군의 대표적 국제공헌 사례로 꼽힌다. 동티모르에 한국은 '위기 순간 도움을 준 나라'로 기억된다. 또한 한국 역시 권위주의를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성취한 경험을 갖고 있어, 동티모르와 '민주주의 전환'이라는 공통 서사를 공유한다. 즉, 한국이 가치 외교를 실현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파트너가 된다는 뜻이다.
경제적으로도 기회가 있다. 가스전 개발이 대표적이다. 천연가스 수입 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동티모르를 통해 LNG 수입선을 다변화할 수 있으며, 해양플랜트·LNG 운반선 분야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한국 기업들에 신규 사업 기회가 열릴 수 있다. 도로·전력·항만 등 인프라 건설에는 한국형 개발 협력 경험이 절실하다.
아세안 내 격차 해소에 기여하는 ODA와 민간 투자도 중요한 대목이다. 또한 동티모르의 젊은 인구 구조를 고려하면 교육·문화 협력과 노동력 교류 역시 유망한 분야다. 한국이 적극적으로 동티모르와 협력한다면 이는 단순히 양자관계에 머무르지 않고, 한국의 대아세안 외교 전반을 업그레이드하는 시험대가 될 수 있다.
종합적으로 동티모르의 아세안 가입은 외견상 작은 나라의 편입이지만, 의미는 절대 작지 않다. 민주주의와 권위주의의 긴장, 개발 격차를 둘러싼 갈등, 역외 세력의 개입이 교차하는 지점에 동티모르가 놓이기 때문이다. 특히 남태평양과 인도양을 잇는 전략적 위치는 아세안 전체의 지정학적 무게중심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 한국에 동티모르는 단순한 신규 회원국이 아니라, 과거 평화유지 활동의 기억과 미래 에너지·해양 협력의 기회가 겹치는 파트너다. 바로 그 지점에서 한국 외교가 새로운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최근 동티모르-한국어 사전(테툼어)을 제작한 최창원 전 동티모르국립대 교수는 "동티모르의 아세안 가입은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역사적 전환점"이라며 "한국도 이제는 원조국을 넘어 협력 파트너로서 함께해야 한다"고 말했다.
동티모르를 외면한다면 한국은 또 하나의 가능성을 놓치게 될 것이다. 반대로 지금부터 관심을 기울이고 관계를 심화시킨다면, 한국은 아세안 내부에서 민주주의·개발·안보 협력의 새로운 축을 만들어낼 수 있다. 작은 나라 동티모르의 가입이 한국 외교에 '큰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호재 아시아비전포럼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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