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평가 유지…적성보다 '점수'따라 과목 선택
교사 업무 과중으로 수업의 질 떨어져
점수 부풀리기·거짓 서류 작성에 노출
"최소성취수준보장지도만이라도 없애야"
친구 깨워주지 않고 수업이동 "이 또한 경쟁"
AI 디지털교과서에 이어 올해 처음 도입한 '고교학점제'도 전면 수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지난 18일에는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사노동조합연맹·전국교직원노동조합 등 교원 3단체와 국회 교육위원회 김영호 위원장, 백승아 더불어민주당 의원, 강경숙 조국혁신당 의원, 정성국 국민의힘 의원이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토론회를 열고 고교학점제 개선 방향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다. 현재 시스템대로라면 학생의 진로·적성에 따라 과목을 선택하고 주도적으로 학습을 설계할 수 있도록 한 본래 취지와 다르게 교육의 질만 떨어뜨릴 수 있어 현장에 맞게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절대평가서 도입하기로 했지만 '상대평가'로 변경되며 변질
고교학점제는 고교 3년간 192학점을 이수하면 졸업할 수 있는 제도다.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6년 말부터 논의돼 2017년 문재인 정부에서 '2022년 도입' 목표로 추진됐다. 이때 고교학점제는 '절대평가' 병행을 전제로 도입하기로 했다. 공통과목은 기존과 같은 석차등급제(상대평가)를 유지하되, 학생들이 고교학점제에서 고르게 되는 선택과목에 대해서는 성취평가제(절대평가)를 적용하기로 했다.
이후 시행 시기가 늦춰지며 올 1학기부터 고교학점제가 본격 도입됐는데, 이 과정에서 선택과목까지 상대평가로 바뀌었다. 내신 9등급제가 5등급제로 바뀌면서 모든 과목의 평가 결과가 절대평가(A~E)와 상대평가(1~5등급)를 함께 기재하도록 하면서부터다. 절대평가를 전제로 설계했던 고교학점제가 상대평가 체제에서 도입, 시행되면서 학교 현장에서는 혼란이 시작됐다. 대구의 한 고등학교 교사는 "학생들이 과목을 선택할 때 적성과 흥미보다 '성적 잘 나오는 과목' 위주로 선택한다"고 말했다. 수강 인원이 적은 과목일수록 내신 받기가 불리하기 때문이다.
내신 5등급제에서는 상위 10%까지 1등급을 받을 수 있다. 이후 34% 2등급, 66% 3등급, 90% 4등급, 90% 미만 5등급으로 구분되는데, 한 학년이 100명도 되지 않으면 내신 1등급 학생은 10명도 나오지 못하는 구조다. 특히 고교학점제가 실시되면 과목별 수강자 수가 이보다 더 쪼개지게 되는데, 수강자가 1~9명인 과목에선 1등급이 한 명도 나올 수 없다. 실력과 상관없이 1등급 진입 자체가 불가능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학생의 진로·적성 기회를 넓히기 위해 도입된 고교학점제가 본래 취지대로 추진되지 않을 가능성도 나오는 이유다. 고교학점제 설계에 참여했던 한 담당자는 "절대평가를 전제로 해야 학생들이 점수에 상관없이 온전히 원하는 과목을 수강할 수 있는데, 상대평가로 바뀌면서 변질됐다"고 했다.
교사 1인이 4과목 담당 "깊이 있는 수업 안 돼"…'최성보' 제도는 없애야
교사들은 고교학점제에서 담당해야 하는 과목이 늘어나면서 수업의 질이 떨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교원 3단체가 지난달 교사 4162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교사 한 명이 2개 이상 과목을 담당하는 비율은 78.5%에 달했다. 4개 이상의 과목을 맡은 비율도 5.0%였다. 이렇다 보니 응답자 중 86.4%는 "각 과목에 대한 깊이 있는 수업 준비가 어려워 수업의 질이 저하된다"고 답했다.
학교생활기록부 작성도 문제로 꼽힌다. 김주영 한국교총 선임연구원은 "고교학점제는 학년이 아닌 학점에 따른 학기제로 운영되다 보니, 학생부 기록량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며 "도저히 개별적으로 다 쓸 수 없어 일부 AI 프로그램을 활용하기도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기록을 위한 교육 활동으로 변질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중 가장 쟁점이 되는 사항은 '미이수제'와 '최소성취수준보장지도(최성보)'다. 고교학점제에서 학생들은 수업 횟수의 3분의 2 이상 출석하고 학업 성취율 40% 이상을 충족해야 학점을 인정받는다. 최소 성취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보충 지도를 받아 학습 결손을 보완해야 하는데, 오히려 '이수 처리'에만 매달리는 부작용을 낳는다는 비판이 나온다.
김희정 교사노조 고교 학점제 TF팀장은 "책임교육이라는 명분으로 시행된 미이수제와 최성보가 현장에서는 유예를 막기 위한 '점수 퍼주기'와 '거짓 서류 작성'으로 변질됐다"며 "미도달 학생들은 보충 지도를 받는 과정에서 자존감을 잃고 자퇴를 선택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고교학점제를 제대로 운영하려면 최소한 미이수제와 최성보만큼은 폐지해야 한다"고 했다.
학생들 "이른 시기 진로 압박" "수업 혼란"
학생들은 조기 진로 결정 압박, 여전한 상대평가에 대한 학습 부담, 이동수업으로 인한 학급 공동체 붕괴 등을 문제로 봤다. 18일 국회 토론회에 참석한 안기백 개성고 학생은 "많은 학생은 아직 진로·적성에 충분히 고민하지 못한 상태인데, 고교학점제에선 과목 선택과 함께 이를 결정하도록 강요한다"고 했다. 또한 "학점제 시행 후 수업마다 교실과 친구 구성이 바뀌다 보니 같은 반 친구와 대화할 기회도 줄어든다"면서 "학교가 '함께 배우는 공간'이 아니라 '혼자 경쟁하는 공간'처럼 느껴진다"고 아쉬워했다.
상대평가가 유지됨에 따른 부작용도 지적했다. 곽동현 가야고 학생은 "내신에 유리하면 진로와 상관없는 과목을 반강제로 선택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며 "교시마다 이동수업을 할 때, 피곤해서 잠깐 자고 있는 같은 반 친구를 깨워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고교학점제가 학교에선 전혀 취지대로 가고 있지 않다"며 "경쟁 구조의 근본 원인을 해결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교육부 관계자는 "교원단체의 요구 사항을 전향적으로 검토하고 있고 앞으로 교원단체와 학생, 학부모 의견을 들어 현장에서 수용성 있는 개선 방안을 만들겠다"고 답했다.
오주연 기자 moon170@asiae.co.kr
꼭 봐야할 주요뉴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