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와 우로, 동과 서로, 남과 여로 갈라치는 대한민국에서 몇 없을 사회적 합의 사례를 꼽으라면 '택배 없는 날'이 있다. 택배기사들은 8월15일 전후로 휴가를 떠난다. 여름 휴가철에 느지막이 걸치면서도 추석 성수기 직전 재충전할 시점이다. 2020년 정부와 주요 택배사가 모여 매년 광복절 연휴를 휴무일로 정하기로 약속하면서다. 손해를 감수하겠다는 기업과 휴식권 보장을 바란 노동자, 하루 이틀쯤 느린 배송은 괜찮다는 소비자의 뜻이 한데 모인 것이다.
올해는 CJ대한통운과 한진이 광복절 전날인 14일을 휴무일로 정해 14~15일을 쉰다. 롯데글로벌로지스와 로젠택배는 토요일인 오는 16일을 택배 없는 날로 지정해 15~17일 총 3일간 휴무다.
짧으면 이틀, 길면 사흘의 쉬는 시간이 주어지자 택배기사들은 자기 자신과 가정을 돌아본다고 한다. CJ대한통운이 자사 택배기사 1751명을 대상으로 지난 6~7일 진행한 설문조사를 보면 택배 없는 날에 하고 싶은 활동으로 가족여행(70.1%)이 압도적인 1위를 기록했고 푹 쉬기(17.6%), 자녀와 외출(8.7%), 고향 방문(3.6%) 순이었다. 가족과 시간을 보낼 수 있고(47.6%) 휴식권을 존중받으며(31.5%) 일과 삶의 균형(워라밸)을 느낄 수 있어서(12.1%) 좋다는 의견도 이어졌다.
택배 없는 날에 만족한다는 반응이 적잖지만 여기저기서 부작용도 포착된다. 우체국에서는 공무원인 집배원과 민간인인 소포위탁배달원 사이 갈등이 해마다 깊어진다. 택배 없는 날 접수된 소포가 집배원 몫으로 넘어오는 탓에 소포위탁배달원이 쉬는 동안 집배원은 과중한 업무에 시달려서다. 정부 관계자는 "원칙대로라면 우정사업본부 산하기관인 물류지원단이 인력 충원 등으로 소포 배달을 책임져야 한다"면서도 "예산 문제가 크고 새로 뽑은 사람은 동네 지리를 잘 모르니 내비게이션 보다가 하루가 다 간다"며 현실적인 어려움을 털어놨다.
이런 '물량 떠넘기기'는 쿠팡이 택배 없는 날에 불참하는 명분으로도 쓰인다. 쿠팡이 직고용한 배송직 사원인 '쿠팡 친구(쿠친)'는 특수고용직인 '퀵플렉서'가 쉬면서 생기는 업무 부담을 쿠친이 떠안을 수 없다며 택배 없는 날에 반대 목소리를 냈다. 업계 관계자는 "택배기사 대부분은 특수고용직으로 자영업자처럼 일하지만 쿠팡은 독특하게 택배기사를 직접 고용하기도 한다"며 "쿠팡이 택배 없는 날에 동참하지 않는 이유로는 쿠친의 반대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노동자 보호는 이재명 정부의 대표 키워드 중 하나다. 세상이 복잡해지면서 노동 역시 새로운 유형이 등장한다. 고용형태가 뒤섞인 물류업계도 마찬가지다. 1년 중 하루 휴무일을 쥐여주는 것만으로는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하기 어렵다. 앞으로 광복절 휴무는 택배기사 간 갈등의 날에서 벗어나 폭넓은 휴식권 보장을 위한 출발점이 돼야 한다. 정부 출범 이후 첫 택배 없는 날을 맞아 세심한 점검이 필요하다.
전영주 기자 ang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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