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수현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장 인터뷰
금융·자본시장 법제 연구와 제도 개선 선도
"사람과 아이디어 잇는 플랫폼 만들고 싶다"
국내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유일의 여성 원장, 첫 여성 한국경제법학회장. 안수현 한국외국어대학교 로스쿨 원장의 커리어다. 안 원장은 30여년간 학문, 실무, 제도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해왔다. 대신증권경제연구소와 금융투자협회에서의 실무 경험, 학계에서의 연구와 교육, 정부·공공기관 자문을 아우르며 금융·자본시장 법제 개선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근에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블록체인, 가상자산 등 신기술·신산업 분야를 법률적으로 분석하고, 제도 정비 방안을 제시하는 연구로 입법과 정책 수립에 기여하고 있다.
안 원장은 한국외대 로스쿨을 '사람과 아이디어가 모이고 확장되는 플랫폼으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구성원이 서로의 역량과 경험을 나누고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조직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 목표다. 동시에 여성 리더로서 후배 법조인들이 경력 단절 없이 전문성을 이어가고, 각자의 분야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연대와 기회의 장을 만드는 데도 힘을 쏟고 있다. 안 원장을 만나 그간 걸어온 길과 앞으로의 비전에 대해 들어봤다.
-여성 법조계의 포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데 지금까지의 과정과 소회에 대해 말해달라.
▲이론을 제대로 연구하려면 실무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처음부터 교수 자리를 우선시하지 않았다. 대신증권경제연구소, 금융투자협회에서 실무를 거치며 경험한 이슈를 이론으로 구성해 널리 알려야겠다고 생각해 충북대 법과대학에서 상법 교수로, 이후 한국외대로 자리를 옮겨 상법·금융법을 가르쳐왔다. 여성으로서는 드문 이력을 가졌지만, 이는 모두 호기심과 관심사에서 출발했다. ESG, 블록체인, 가상자산, 메타버스 등 새로운 현상을 법적으로 분석해 제도 개선안을 마련하고, 이를 입법·정책 현장에 반영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고자 했다. 연구 성과를 후배·동료와 공유하며 함께 성장한 것이 지금까지 원동력이다.
-여성 법조인의 수는 늘었지만, 고위직 진출은 여전히 쉽지 않다.
▲세계변호사협회에 따르면 1990년대 말 이후 한국의 여성 변호사 수는 꾸준히 증가했지만, 여전히 법조계에서 과소대표되고 있다. 2023년 말 기준 여성 변호사 비율은 29%에 불과하며 로펌 고위직 비율은 13%로 더 낮다. 반면 로스쿨 신입생 중 여성 비율은 48.2%, 변호사시험 합격률은 약 50%로 진입 단계에서는 성비가 거의 비슷하다. 고위직으로 갈수록 '젠더 갭'이 확대되는 구조다.
-걸림돌은 무엇인가.
▲제도적 걸림돌로는 경력단절을 전제하지 않는 승진체계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고위직 기회도 남성 중심의 대면 네트워크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학교의 경우 장벽이 낮아진 듯 보이지만, 논문 실적과 학교 운영 참여가 중요한 평가 요소이기에 출산·육아의 부담이 여전히 크게 작동한다. 문화적 걸림돌로는 여성 법조인들이 참고할 만한 롤모델이 부족하다는 점이 있다. 본인의 상황에 맞는 선배를 찾기 어렵고, 커리어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체계적 지원 시스템도 아직 충분하지 않다.
-그렇다면 질적 성장과 영향력 확대를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여성 법조인의 수가 늘어난 것은 분명한 진전이지만, 질적 성장과 영향력 확대를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우선, 공익성과 사회적 가치를 지닌 프로젝트에서 리더십을 발휘할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이런 경험은 전문성과 영향력을 동시에 키울 수 있는 중요한 토대가 된다. 또 법률 해석과 적용을 넘어 사회적 배경과 이해관계자의 요구를 읽을 수 있도록 정부, 산업, 학계 등 다양한 분야와의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넓혀야 한다. 폭넓은 시각과 융합적 사고가 창의적 해결책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조직 내에서 리더십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카리스마형 리더십뿐 아니라 협력적이고 포용적인 리더십도 조직을 성장시키는 중요한 동력임을 인식하는 문화가 자리 잡아야 한다.
-원장으로서의 운영 철학은.
▲로스쿨은 단순한 교육기관을 넘어 '플랫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플랫폼은 구성원들이 서로 연결되고 상호작용하며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기반이다. 재학생·졸업생·교수·직원이 심리적 유대감을 느끼고 서로의 성장을 지원하는 환경이 마련돼야 조직이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이에 원장으로서 구성원이 모이고 교류하며 네트워크를 공고히 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지난해 개원 15주년을 맞아 재학생, 졸업생, 법전원 발전에 기여한 분들을 한자리에 모아 교류의 장을 만든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이런 연결과 신뢰가 법전원의 역량을 배가시키고, 나아가 구성원 각자의 성장을 촉진한다고 믿는다.
-한국외대 로스쿨이 추구하는 인재상은.
▲한국외대 로스쿨은 자주적·국제적·창의적 법조인 양성을 교육이념으로 삼고 있다. 특히 변화가 빠른 오늘날 전문성과 윤리성을 갖추는 것은 기본이고, 여기에 미래지향적인 개척정신도 필요하다. 인공지능(AI), 블록체인, 디지털자산, ESG 등 새롭게 등장하는 분야를 이해하고, 법제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창의성과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춘 인재가 돼야 한다. 표준과 관행이 정립되지 않은 영역일수록 법률가의 해석과 규범 설계가 중요하기 때문에 글로벌 시각과 융합적 사고를 겸비한 법조인을 길러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법조인 윤리와 공공성은 어떻게 지도하는가.
▲윤리의식과 공공성은 법조인의 신뢰를 지탱하는 근간이다. 로스쿨에서는 교과목으로 법조윤리 수업을 운영하고, 사회적 약자 및 공익에 직결된 과목과 법률클리닉을 통해 공익변호사 지도 아래 상담·무료 소송 지원 등 실제 경험을 쌓게 하고 있다. 생활 면에서는 24시간 함께 공부하는 밀도 높은 환경 속에서 자율적으로 규범을 만들고 지키도록 해 타인에 대한 배려가 자연스럽게 체화되도록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원생들의 심리적 안정감이 공공성과 배려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해 오프라인·온라인에서 자주 소통하며 응원과 조언을 아끼지 않고, 전문성과 윤리성 함양에 도움이 되는 자료와 정보를 꾸준히 제공하고 있다.
-법조인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부친께서 증권감독기구에서 근무하시며 1984년 서울대 법대에서 국내 최초로 증권거래법 박사학위를 받으셨다. 그 영향으로 일찍부터 자본시장 분야에 관심을 가졌고 졸업 후 대신증권경제연구소에서 실무를 경험했다. 이후 석·박사 과정을 거치며 금융투자협회 근무 당시에도 실무에서 제기된 이슈를 이론으로 정리해 법과 제도 개선 방안을 제안하는 논문을 꾸준히 발표했다. 이 과정에서 법학이 단순한 학문이 아니라 산업과 경제, 그리고 사회를 실질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분야라는 확신과 책임감을 갖게 됐다.
-금융법 분야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게 된 배경은.
▲최근 10여년은 금융법, 그중에서도 금융소비자법 연구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첫 직장인 증권경제연구소 경험도 영향을 줬지만, 결정적인 계기는 2002년 금융투자협회 근무 시절 금융감독원에 파견돼 불공정거래제도 개선 TF에 참여했던 경험이었다. 당시 공정한 자본시장 확립이야말로 금융소비자 보호의 핵심이라는 점을 절감했다. 이후 법률 제도뿐 아니라 이를 집행하는 감독기관의 역량, 소비자 참여, 자율규제기관의 역할까지 아우르는 종합적인 시각에서 금융법을 연구하게 됐다. 실질적인 소비자 보호를 위해서는 법과 제도, 집행, 참여가 균형 있게 맞물려야 한다는 확신이 지금까지 제 연구 방향을 이끌고 있다.
-후배 여성 법조인들에게 조언한다면.
▲일과 가정을 병행하는 여성 법조인은 시간, 에너지, 역할 등 여러 측면에서 압박을 받기 때문에 완벽한 균형을 이루기 쉽지 않다. 중요한 것은 본인이 감당할 수 있고 지속 가능한 방식을 찾는 것이다. 직장·가정·사회 네트워크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만큼 우선순위를 세우고, 상황에 맞춰 강약과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 필요하다. 때로는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소진될 때까지 일하는 경우도 보지만, 번아웃이 오면 모든 영역이 힘들어진다. 조금 늦더라도 멈추지 않고 꾸준히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꼭 전하고 싶다.
▶안수현 한국외국어대 법학전문대학원장은
변선진 기자 sj@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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