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푸드 거버넌스 보고서]<5편>
시총 상위 20개 식음료 상장사
폐쇄적 주총·형식적 공시 주주권 제약
이사회 독립성·임원 보수 승인권 강화
세제 인센티브 병행한 투트랙 전략 필요
매년 5월 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는 전 세계 투자자들의 순례지가 된다. 워런 버핏이 이끄는 세계 최대 투자회사 버크셔 해서웨이 주주총회 때문이다. 주총은 단순한 회계보고 자리가 아니다. 무려 5시간에 걸친 질의응답, 자회사 전시·상품 판매, 마라톤 대회와 피크닉까지 축제의 장이 펼쳐진다. 이른바 '자본주의자의 우드스톡'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다.
영국의 소비재 기업 유니레버 역시 주주와의 소통에 공을 들인다. 주총 7주 전 소집 통지를 보내 안건을 미리 검토하게 하고, 홈페이지에 '주총 기록 보관소'를 만들어 안건과 투표 결과를 연도별로 투명하게 공개한다.
국내 식품·음료 기업의 주총은 사뭇 다르다. 경영진과 주주간 질의응답은 형식에 그치고, 불편한 질문은 피해간다. 소집공고는 법이 허용하는 2주 전에 발송되며, 열흘 전까지 공시조차 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다. 최근 들어 국민연금 등 기관투자자와 일부 소액주주들이 의결권 행사와 소송으로 목소리를 높였지만, 성과는 제한적이다. 지난해 대표소송은 연간 3건 안팎에 불과하다. 한 거버넌스 전문가는 "경영 판단이 주주 피해로 이어져도 소송 제도가 활성화되지 않아 구제가 어렵다"며 "주총이 경영진이 두려워하는 실질적 의사결정기구로 자리 잡고, 주주 발언이 제도적으로 보장되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을 골자로 한 개정 상법이 시행됨에 따라 국내 식음료 기업은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주주 권리 보장과 이사회 독립성과 관련해 여전히 '껍데기 거버넌스'라는 평가를 받는 만큼, 공시 요건만 형식적으로 충족하는 관행에서 벗어나 주주를 경영의 동반자로 인정하고, 장기적 가치 창출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중복상장 해소…최소 유통주식 규제 필요
특히 국내 상장 식품사들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된 중복상장을 막기 위한 해법으로 상장 유지 요건을 재정비하고, '밸류업 인센티브'를 확대하는 개정 상법 시행에 따른 제도 보완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국내 시가총액 상위 20개 식음료 기업 가운데 11곳은 지주사와 사업회사를 동시에 상장한 '중복상장'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국내 중복상장 비율은 18.4%로 미국(0.35%)은 물론 대만(3.18%)·중국(1.98%)보다도 훨씬 높다. 일본(4.38%)의 4배를 넘는 수준이다. 일본은 '밸류업' 정책을 통해 이 비율을 더 낮추는 중이다.
이에 우리나라도 '최소 유통주식 비율'을 상장 요건으로 법제화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유통주식 비율 규제를 도입하면 지주사와 계열사 모두 상장 요건을 맞추기 어려워지고, 지분 매각 등으로 이어져 중복상장을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유통주식 비율 25% 이상 유지'라는 규정이 생기면 지주사가 자회사 지분을 75% 이상 들고 있을 경우, 기준에 맞추기 위해 지주사가 보유 지분을 매각하거나 상장을 포기하는 선택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이준서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일본도 과거에는 모자회사 중복상장이 많았지만, 최소 유통주식 비율을 법제화해 전략적 지분 비율이 높은 기업에 상장 유지 불이익을 부과했다"며 "결과적으로 자회사 지분 매각이나 상장 폐지를 유도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도 적정 유통주식 비율을 산정·명문화하면 중복상장으로 인한 소액주주 권리 침해를 완화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밸류업 우수 기업엔 혜택, 미흡한 곳엔 규제
지배주주 견제를 위해 이사 선임 제도도 추가로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국내는 이사 임기가 3년이고 연임 제한이 없어 지배주주 견제가 쉽지 않은 구조다. 미국·유럽은 매년 주총에서 이사회 전원을 재선임하며, 주주 질의에 성실히 답하지 않으면 연임이 어렵다. 독일은 법으로 노동계 대표의 이사회 참여를 보장한다.
임원 보수와 계열사 내부거래 승인 권한을 주주총회에 부여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왔다. 김우찬 고려대 교수(경제개혁연구소장)는 "외국은 임원 보수를 주총에서 승인하지만, 한국은 이사회나 CEO가 스스로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며 "총수 일가가 계열사 곳곳에서 거액을 받고, 내부거래로 지분 많은 회사에 일감을 몰아주는 관행을 막으려면 주주 사전 승인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전문가들은 지배구조 우수 기업에는 법인세 감면·세액 공제, 지방세 경감 등 실질적인 세제 혜택을 제공하고, 미흡한 기업에는 규제를 강화하는 '투트랙 전략'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예컨대 장기 배당 정책을 이행하거나 자사주 소각·매입 등 주주환원 성과를 낸 기업에는 법인세율 인하나 투자·연구개발(R&D) 비용 세액 공제를 확대하고, 매년 밸류업 성과를 평가해 표창하는 방식이다.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회계·공시·지배구조·감사감독 기능을 통합한 '기업거버넌스 개혁위원회' 설치 방안도 거론된다. 영국의 재무보고위원회(FRC)가 이러한 기능 통합형 감독기구의 주요 참고 모델로 꼽힌다.
한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기업 입장에서는 거버넌스 개혁이 경영 경직으로 비칠 수 있는 만큼 그에 상응하는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한다"며 "획일적 기준 설정은 어렵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세제 혜택 등 실질적 장치를 마련해 기업 참여를 독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예주 기자 dpwngks@asiae.co.kr
구은모 기자 gooeunm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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