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만에 통일부 수장으로 귀환한 정동영 장관의 행보는 마치 드라마 명장면 모음집 같다.
'적막한 판문점에서 남자 주인공은 끊어진 남북 직통전화를 들고 먹통인 걸 알면서도 벨을 세 차례 눌러 본다. 이어진 침묵. 취임식에선 주인공의 과거 활약이 담긴 사진, 영상이 단편영화처럼 흐른다.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묘소를 찾은 주인공은 감정이 격해져 뜨거운 눈물을 터뜨린다. 작심한 그는 불과 열흘여 앞둔 한미연합훈련 조정을 대통령에게 전격 건의하기에 이르는데….'
이는 정 장관이 부임 후 실제로 행동한 일들이다. 이러한 예고편에 속고 만 것일까. 올해 한미연합훈련에서 당초 40여건으로 계획됐던 야외기동훈련 중 20여건이 내달로 미뤄지긴 했지만 통일부 장관 건의에 따른 '대북 유화책'으로 한미가 훈련을 조정했다고 보기엔 애매한 규모다. 군 당국은 연기 이유도 '폭염 때문'이라고 했다.
통일부 고위 관계자는 애써 "(건의에 따라) 조정된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으나 김이 새는 건 어쩔 수 없다. 설사 훈련이 대폭 조정되거나, 심지어 유예됐을지언정 북한이 이에 호응했을지도 회의적이다. 한 손엔 고도화된 핵미사일, 다른 손엔 거대 우방국 팔을 움켜쥔 현재의 북한은 정 장관이 2004~2005년 통일부 수장을 처음 맡았던 시절의 북한이 아니다.
20년의 세월, 어디 북한만 변했겠나. 남북관계는 언제나 롤러코스터였다. 특히 문재인 정부 당시 6·25 정전협정 이후 사상 처음으로 성사된 북·미 정상회담에 고조됐던 국민 기대감은 2019년 이른바 '하노이 노딜 사태'로 산산이 조각났다. 폭발로 무너져 내린 남북연락사무소를 지켜보며 민심은 냉랭해졌다. 북한이 깨부순 건 단순히 건물이 아니라 북한을 '대화 가능한 상대'로 기대했던 우리 국민의 믿음이었다.
통일부 청사 안과 밖의 온도는 과거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특히나 '전편'을 보지 못한 젊은 세대에게 정 장관의 격정적인 행보는 당황스러울 정도다. 본인이 기억하는 남북교류 시대의 영광을 온 국민이 고스란히 공감할 것이라고 착각해선 안 된다.
현재의 남북관계는 기시감 가득한 낡은 정책으로는 돌파구를 찾기 어렵다. 미국 정상의 독특한 캐릭터와 충동성에 기대어 시도했던 '실험'은 이미 한 차례 실패했다. 축적된 전략 없이는 진보·보수 정부 할 것 없이 무기력할 뿐이다. 국민이 '경력직' 통일부 장관에 바라는 건 무엇일지 정 장관은 다시 고민해야 한다.
돌발적이고 설익은 아이디어는 신입사원에겐 미덕일지 몰라도 경력직엔 아니다. 냉철하고 노련한 전략가가 되어 철저히 계산된 성과를 가져와야 한다. 경력직에게 허락된 허니문은 생각보다 길지 않을 수 있다.
손선희 기자 sheeso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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