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연고 아동 감정 뒷전 보호 절차
정서 우선한 법률·인식 변화 필요
열세 살 소녀 수연(김보민)은 외톨이다. 유일한 보호자 할머니를 잃었다. 아동복지시설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한다. 수연은 상황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보호자를 직접 찾기로 결심한다.
영화 '수연의 선율'은 세상에 홀로 남겨진 아동의 현실을 그린다. 현행 아동복지법과 입양특례법은 기본적 틀을 제공한다. 친권자나 후견인이 없는 경우 지방자치단체장이 보호조치를 취하고, 아동복지시설 입소나 가정위탁, 입양 절차 등을 진행한다.
겉보기엔 충분해 보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행정적 효율성과 법적 안전성에 무게가 실리다 보니 아동의 마음과 고민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는다. 특히 의사 표현이 서툰 아동일수록 그 한계는 뚜렷하다. 의견을 듣는 절차가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형식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수연의 역시 다르지 않다. 할머니의 죽음이 남긴 충격과 분리불안을 해소할 틈도 없이, 시설 입소를 강요당한다. 도움을 청해도 주위의 반응은 위로나 동정에 머문다. 진심 어린 손길은 좀처럼 닿지 않는다.
환경의 변화는 어떤 형태든 아동에게 큰 스트레스다. 심리적 준비 없이 변화가 이뤄진다면 정신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애착 장애, 우울증, 불안장애 등은 성인이 돼서도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영화 속 또 다른 아이, 일곱 살 소녀 선율(최이랑)은 그 위험성을 상징한다. 한 부부에게 입양됐지만, 집에만 가면 말수가 줄어든다. 버림받지 않으려는 나름의 생존 전략이다. '착하고 말 잘 듣는 아이'가 돼야 한다는 압박이 그녀를 짓누른다.
그런데도 부부는 무관심하다. 아이를 방치하다가 유튜브 후원금 모금에만 이용한다. 기죽은 선율은 침대 밑이나 옷장 안에서만 잠을 잔다. 부부가 말없이 떠난 뒤에도 습관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수연마저 떠날까 두려워, 말이 더 줄어든다.
보건복지부가 2019년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양육시설과 공동생활가정 아동의 69.8%는 학대나 애정 결핍을 경험한다. 그중 30%는 심리지원이나 치료를 받지 못한다.
건강한 성장을 위해서는 아동 중심의 보호 체계로 전환이 필요하다. 단순한 법적 절차의 준수를 넘어, 아동의 정서적 안정과 건강한 발달을 최우선에 두어야 한다. 복지시설 입소나 입양 이전부터 충분한 상담과 준비 과정을 거쳐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야 한다.
그 시작은 아동의 의견을 실질적으로 반영하는 시스템이다. 형식적인 청취가 아닌 아동이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고 진심으로 원하는 바를 표현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과 전문적인 도움을 제공해야 한다.
물론 법률 개정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무엇보다 사회 전체의 인식 변화가 선행돼야 한다. 보호가 필요한 아동을 '도움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존중받아야 할 권리의 주체'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때 비로소 법은 아이들에게 따뜻한 울타리가 될 것이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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