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구조 변화가 가계부채에 미치는 영향'
"기대수명 증가로 자산 축적 촉진"
지난 20여년간 우리나라 가계부채가 꾸준히 늘어난 배경에는 기대수명 증가로 인한 자산 축적 동기 강화가 있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중·고령층은 노후 대비를 위해 금융자산을 축적하고, 청장년층은 자금을 차입해 주택 위주로 자산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가계부채가 확대했다는 것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5일 발표한 '인구구조 변화가 가계부채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를 통해 향후 인구 고령화 심화로 인해 가계부채 비율이 하락세로 전환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김미루 KDI 연구위원은 "가계부채의 장기 상승은 경기순환보다 구조적 요인에 더 크게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며 "기대수명 증가가 자산 축적을 촉진했고, 세대 간 자금 흐름을 통해 부채 증가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6일 서울 성북구 길음데이케어센터에서 어르신들이 만들기 활동을 하고 있다. 일명 '노치원'(노인+유치원)으로 불리는 데이케어센터는 요양시설에 갈 정도는 아니지만, 초기치매 등 노인성질병으로 혼자서 일상생활이 어려운 노령층(장기요양1~5등급)을 돌봐주는 시설이다. 강진형 기자
기대수명 늘며 자산 축적 수요↑…부채 증가로 이어져
우리나라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1990년대 후반 이후 뚜렷한 등락 없이 꾸준히 상승해왔다. 2025년 1분기 기준 90.3%로, 스위스(125.8%) 등 일부 국가를 제외하면 세계 최고 수준이다. 같은 기간 실질금리는 하락세를 보여, 자금 수요보다 공급이 더 많이 증가했음을 시사한다.
KDI는 자금 공급 확대 배경으로 '기대수명 증가'를 지목했다. 기대수명이 늘어나면서 가계는 노후에 대비한 자산 축적에 나섰고, 특히 고령층은 금융자산을, 청장년층은 주택자산을 중심으로 자산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부채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2014년 대비 2024년 연령대별 자산 구조를 비교한 결과 고령층은 순자산과 순금융자산이 모두 늘어난 반면, 청장년층은 순자산은 늘었지만, 부채를 반영한 순금융자산은 오히려 줄었다. 이는 고령층이 자금을 공급하고, 청장년층이 이를 차입하는 구조를 보여준다.
"청년 줄고 고령자 늘면 가계부채 줄어든다"
보고서는 연령대별 인구구성 변화도 가계부채 흐름에 영향을 준다고 분석했다. 가계는 생애주기에 따라 소득이 변화하는데, 청장년층은 미래 소득을 앞당기기 위해 차입을 늘리고, 고령층은 소비 위주로 자금을 지출한다. 이에 따라 인구 중 청장년층 비중이 클수록 가계부채가 증가하고, 고령층 비중이 커질수록 부채는 줄어드는 경향을 보인다.
KDI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35개국의 장기 패널 데이터를 바탕으로 실증분석을 실시한 결과, 기대수명이 1세 증가할 때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약 4.6%포인트 증가한다. 청장년층(25~44세) 비중이 1%포인트 감소하고 고령층(65세 이상)이 1%포인트 증가할 경우에는 가계부채 비율이 약 1.8%포인트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는 "지난 20년간 가계부채 비율 상승분 중 28.6%포인트는 기대수명 증가로, 4.0%포인트는 인구구조 변화로 설명된다"며 "반면 순자산 지니계수(자산 불평등)는 1.0%포인트, 금융건전성 규제는 -2.3%포인트 수준으로 영향이 제한적이었다"고 밝혔다.
"앞으로는 가계부채 자연 감소…총량규제보다 구조적 접근 필요"
보고서는 이러한 인구 구조의 변화를 반영할 때, 가계부채 비율은 수년 내 정점을 찍고 추세적 하락 국면에 접어들 것으로 전망했다. 실제로 통계청 장래인구추계에 따르면 2070년까지 기대수명은 6.4세 증가하지만, 고령화에 따른 인구구조 변화는 가계부채 비율을 57.1%포인트 낮추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됐다. 결과적으로 2070년에는 현재보다 가계부채 비율이 약 27.6%포인트 낮아질 것으로 분석됐다.
김 연구위원은 "향후 가계부채 정책은 임의의 총량 목표를 설정해 관리하기보다는 구조적 흐름을 반영해 상환능력 평가 중심으로 설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금융시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한, 자금 흐름을 과도하게 제약하기보다는 금융기관의 거시건전성과 차주의 상환능력 평가를 중심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DSR 예외 축소·노동시장 유연화 등도 과제로 제시
보고서는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제도 운영과 관련해서도 예외 조항 축소 필요성을 제기했다. 현재 정책모기지나 전세대출 등 일부 금융상품에 대해 DSR 적용이 완화되거나 배제되면서, 상환능력과 무관한 대출이 이뤄지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KDI는 "DSR 예외 조항은 단기적으로 취약계층의 자금 접근성 확보에 도움이 될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제도의 실효성을 훼손하고 시장의 위험 판단 기능을 왜곡할 우려가 있다"며 "예외 인정 시에도 엄격한 상환능력 평가 기준을 마련하고, 리스크 기반의 차등 적용 체계를 갖출 필요가 있다"고 했다.
또 정책금융 공급의 과잉도 부채 확대 요인 중 하나로 지적됐다. 보고서는 과도한 보증 비율, 낮은 보증료율 등이 비효율적 자금 운용을 초래할 수 있다고 보고, 사회적 취약계층을 제외하고는 적정 보증료율과 리스크 기반 평가 체계 도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노동시장 측면에서도 연공서열 중심의 임금 구조를 개편해 직무·성과 중심의 유연한 임금체계로 전환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보고서는 퇴직 연령은 정체된 반면, 기대수명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어 고령층의 자산 축적 압박이 심화하고 있다면서 노동시장 경직성 완화는 가계부채 증가세 완화에도 기여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세종=이동우 기자 dwle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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