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오버 더 모빌리티](26)
현대차, 하이브리드부터 전기차까지 배터리 설계
세계 최초 리튬이온 배터리 양산차 적용
남양·의왕·마북 이어 안성까지 연구 거점 확보
반도체도 자체 설계 강화…현대모비스 주도
자율주행 시대, AI 반도체 중요도 ↑
올 초 만난 현대차그룹 배터리 담당 임원은 이같이 강조했다. 현대차그룹은 부품 내재화 전략으로 배터리·반도체 등 핵심 부품에 대해 완성차 제조사가 기술 리더십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과거 수차례 공급망 위기를 겪으면서 핵심 부품을 직접 만들지는 않더라도 개발과 설계 기술은 보유해야 한다는 인식이 더욱 강해졌기 때문이다. 2021년 반도체 공급 부족 사태가 전 세계를 덮쳤을 때 완성차 업체가 자체적인 반도체 설계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대체 파운드리 업체를 발굴해 생산을 맡기고 반도체 업체와의 협상력을 높여 구매 우선순위를 확보하는 등 더욱 신속한 대응이 가능했을 것이다.
배터리 역시 마찬가지다. 배터리 제조사들은 용량이 크고 수익성이 높은 전기차(EV)용 배터리 수주에 집중하며 하이브리드 차량(HEV)용 배터리 공급은 후순위로 미뤄왔다. 그러나 최근 전기차 수요 정체(캐즘)로 시장 분위기가 급변하면서 완성차 업체 입장에선 오히려 하이브리드 배터리 확보가 시급해졌다. 이에 현대차그룹은 현대차 · 기아 특성에 맞춘 하이브리드 배터리를 직접 설계하는 전략을 택했다. 물론 설계와 양산 단계에서 배터리 협력사의 기술 지원은 여전히 필요하다. 하지만 차량의 목표 성능을 구체화하고 배터리 장착 이후 품질을 평가·최적화하는 과정에서 완성차 업체의 책임과 역할은 점차 강화되는 추세다. 현대차그룹이 최초로 핵심 설계에 참여한 하이브리드 배터리는 2023년 출시된 5세대 싼타페 하이브리드를 시작으로 K8 하이브리드, 팰리세이드 하이브리드 등 다양한 모델에 순차 탑재되고 있다.
현대차 배터리 개발 역사, 시작은 평양에서
현대차그룹의 배터리 내재화 전략은 단기간에 완성된 것이 아니다. 그 출발은 2007년 평양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현대차는 브랜드 최초 하이브리드 차량 출시를 위한 개발에 한창이었다. 이를 위해 새로운 차량용 리튬이온 배터리 개발이 간절했다. 하지만 LG화학 경영진을 비롯한 배터리 업계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당시만 해도 리튬이온 배터리는 노트북이나 스마트폰 등 소형 IT 기기에는 널리 쓰였지만 자동차용으로 쓰인 사례는 없었다. 일본 니켈 메탈 하이브리드 배터리를 수입해 사용하는 쉬운 길도 있었지만 현대차는 어려운 국산화의 길을 택했다. 이를 위해서는 배터리 제조사인 LG화학의 도움이 절실했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은 2007년 남북정상회담의 특별 수행원 자격으로 평양을 함께 찾은 고(故) 구본무 선대회장을 만나 자동차용 리튬이온 배터리 개발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설득했다. 두 회장은 그 자리에서 의기투합했고, 실무진에게 공동 개발을 지시했다. 2년 후인 2009년 현대차는 브랜드 최초의 하이브리드 차량인 '아반떼 LPi 하이브리드'를 세간에 내놨다. 이 차에는 현대차와 LG화학이 공동 개발한 리튬이온 배터리가 탑재됐다.
리튬이온 배터리를 '양산차'에 적용한 것은 세계 최초였다. 1996년 닛산이 최초의 리튬이온 전기차를 선보였지만 양산차는 아니었다. 도요타 등 다른 하이브리드 경쟁사는 니켈메탈 배터리를 쓰고 있었다. 이후 닛산이 리튬이온 전기차의 '양산형' 모델 리프를 내놓은 건 현대차 아반떼 하이브리드가 나온 지 1년 후인 2010년이다.
'글로벌 완성차 톱3' 현대차의 배터리 개발, 어디까지 왔나
현대차는 하이브리드에서 쌓은 배터리 개발 자산을 전기차에서 꽃피웠다. 배터리는 전기차 원가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핵심 부품이다. 배터리 성능 개발과 공급망 관리, 원가 경쟁력 확보가 전기차 시장에서 성패를 가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차그룹은 배터리 제조와 설계 등 개발 역량을 갖추기 위해 2032년까지 9조5000억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연구개발(R&D) 조직 내에 '배터리개발센터' 전담 조직을 만들고 남양과 의왕, 마북까지 3곳의 배터리 개발 거점을 운영 중이다. 남양연구소는 배터리의 기본 연구와 내재화 준비를 맡는다. 의왕연구소는 파일럿 생산과 상용화 테스트에 집중한다. 마북연구소는 현대모비스 주도로 BMS(배터리 매니지먼트 시스템) 개발과 전동화 모듈 등 전장부품 연구개발에 주력한다.
현대차그룹은 2027년 가동 목표로 경기도 안성에 배터리 연구단지 및 기가와트시(GWh)급의 생산라인을 구축하고 있다. 이곳에서 연구는 물론 상업화 테스트를 진행한다. 최소 1GWh의 라인을 구축한다 해도 연간 1만5000대 내외의 전기차 배터리를 공급할 수 있는 양이다. 시범 생산 및 내재화 연구 수준에서는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라는 분석이 나오면서 배터리 제조사는 물론 경쟁 완성차 업체의 견제와 관심이 이어지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시제품이나 양산 기술 개발을 위해 생산 라인을 짓는 것은 사실이지만 완성차에 투입하는 본격적인 대량 생산은 아니라고 일축했다. 배터리 업계에서도 당장 현대차의 직접 양산 가능성은 낮게 보고 있다. 하지만 자체 생산 라인을 갖춘 도요타나 자회사를 통해 내재화를 추진 중인 폭스바겐그룹 등 경쟁사의 동향을 감안할 때 현대차도 시장 상황이 급변하거나 기술 성숙도가 올라오면 언제든 전략 전환이 가능하다고 본다.
최우선 과제는 공급망 안정성
배터리 내재화의 또 다른 축은 공급망 리스크를 줄이는 안정적 조달 시스템 구축이다. 현대차그룹은 SK온, LG에너지솔루션 등 배터리 제조사와 손잡고 합작 공장을 세워 배터리 생산 권한과 지분을 일부 확보하는 전략을 병행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과는 인도네시아에 연 10GWh 규모의 배터리 합작 공장을 세워 2024년부터 가동하고 있으며 미국 조지아주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아메리카(HMGMA) 주변에도 LG에너지솔루션, SK온과 각각 전기차 30만대 분량의 합작 공장을 세워 올해부터 가동에 들어간다.
신흥 시장 전략은 철저한 현지화로 대응한다. 인도에서는 현지 업체 엑사이드 에너지솔루션즈와 배터리 셀 공급 계약을 체결하고 현지 전략 차종에 인도산 LFP(리튬인산철), NCM(니켈코발트망간) 셀을 기반으로 한 배터리를 탑재했다. 중국 시장에서도 중국 현지 배터리 업체가 만든 배터리를 적용했다. 베이징현대가 오는 9월 중국 시장에 선보일 전기차 '일렉시오'에는 BYD가 만든 LFP 배터리가 탑재되며 기아가 2023년 중국에 출시한 EV5 전기차에도 BYD LFP 배터리가 적용됐다.
최근에는 국내 출시 전기차에도 가격 경쟁력이 있는 중국산 배터리 탑재를 늘리고 있다. 배터리 소싱 다변화 정책을 통해 다양한 가격대의 전기차 라인업을 만들기 위해서다. 기아는 올해 8월 국내 출시를 앞두고 있는 EV5에 중국 CATL의 삼원계(NCM) 배터리를 적용하기로 했다. 현대차·기아가 중형 차종에 중국 배터리를 적용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미래차 또다른 핵심부품 반도체 전략은
미래차의 또 다른 핵심 부품인 반도체는 어떨까. 2009년 현대차는 독일 반도체 업체 인피니온과 함께 차량용 반도체인 '아리수(Arisu-LT)'를 공동 개발하며 본격적인 반도체 내재화에 나섰다. 아리수는 현대차가 개발한 최초의 반도체로 램프를 제어하는 여러 기능을 하나로 모아놓은 통합 반도체다. 칩 생산은 독일에서, 조립은 한국에서 이뤄졌다. 2000년대부터 주행보조기능, 인포테인먼트 등 미래차 전장화 흐름이 강조되면서 현대차그룹은 반도체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인식하고 주목해왔다.
2020년대 들어서는 반도체 자체 설계 역량도 강조하고 있다. 그룹사의 반도체 내재화는 핵심 계열사인 현대모비스 가 주도한다. 현대모비스가 디자인해서 완성차에 탑재한 반도체는 현재 16종 정도다. 현대모비스가 원하는 사양과 맞춤형 요구사항을 정한 뒤 팹리스 업체에 설계를 요청하고 파운드리에 주문을 넣는다. 이 과정에서 현대모비스는 생산 공정에서 노하우와 데이터를 협력사와 공유하면서 품질 확보와 기술 내재화에 집중한다. 현대모비스는 2020년 현대오트론의 반도체 사업 부문을 인수하며 본격적으로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었다. 올해부터는 핵심 설계 과정에 관여한 반도체 양산에 돌입한다. 아울러 해외 우수 인재 확보를 위해 미국 실리콘밸리에 반도체 연구 거점도 구축한다.
올해부터 양산에 돌입하는 주요 반도체는 전기차 전원 제어기능을 합친 전원통합칩과 램프 구동 반도체 등이다. 이미 공급 중인 배터리관리집적회로(IC)는 차세대 제품 개발에 속도를 낸다. 외부 협업을 위해 현대차그룹은 경쟁력 있는 팹리스 업체에 지분 투자도 늘리고 있다. 차량용 반도체 팹리스 스타트업인 보스반도체에 20억원 이상 투자했고, 캐나다 AI반도체 스타트업 텐스토렌트에 600억원 이상 전략적 투자를 단행했다. 현대모비스는 미국 시스템반도체 스타트업인 엘리베이션 마이크로시스템스에 1500만달러(210억원) 이상 자금을 투입한 바 있다.
미래차 시대, 반도체는 왜 중요한가
과거 기계식 또는 아날로그(물리적인 와이어 등) 방식이었던 자동차 부품은 점차 '전장화(전기전자 장치화)'되고 있다. 운전할 때 핸들부터 가속페달, 에어컨, 사이드미러, 계기판, 디스플레이, 램프 등 모든 부품이 전기신호로 제어되고 작동하는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심지어 와이퍼를 하나 움직일 때도 전기 신호가 필요하다. ON/OFF 버튼이나 레버를 움직이면 이 신호가 센서로 감지돼 제어 전자장치로 전달되고, 다시 이 신호가 각 부품의 전기적인 동작(모터의 움직임 등)으로 연결된다. 이 과정에서 신호를 전자적으로 처리·변환하는 '반도체'는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현시대의 자동차에선 모든 부품에 반도체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앞으로 펼쳐질 자율주행 시대에 AI 반도체의 중요성은 더 이상 강조할 필요가 없다. 자율주행차는 수십~수백 개의 센서에서 들어오는 실시간 정보를 테라바이트(TB) 단위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정보를 분석해 도로 상황을 인식하고 주행 상황을 제어하며 돌발 위험 상황에 대응한다. 이 과정은 지체 없이 실시간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래야 교통체증이나 사고를 피할 수 있다. 방대한 정보를 수집·연산·제어하고 통신·보안·저장 작업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선 모든 처리의 중심에 있는 고성능 AI 반도체가 반드시 필요하다. 시장조사 업체 글로벌마켓인사이트에 따르면 2022년 차량용 AI 반도체 시장 규모는 23억달러(약 3조1800억원) 이상이며 2032년 150억달러(약 20조7600억원)로 연평균 20% 이상 성장이 예상된다. 전체 AI 반도체 시장에서도 차량용 분야는 자율주행과 지능형 차량의 확산에 따라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분야로 꼽힌다.
우수연 기자 yesi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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