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챗봇과 자동화 시스템
설명 없는 기술이 만든 '새로운 소외'
이제는 AI를 모르면 뒤처진 사람처럼 느껴지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그 화려한 기술 담론 뒤에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소외가 존재한다. 사람들이 기술을 멀리하는 이유는 기술을 두려워하거나 무지해서가 아니라, 그 기술이 자신의 삶과 무관하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설명되지 않은 기술은 곧 남의 일처럼 느껴지고, 사람들은 조용히 자신을 그 바깥에 두게 된다.
인터페이스는 점점 더 단순해지지만, 역설적으로 세상은 더 낯설어지고 있다. 우리는 늘 기술의 편리함을 말하지만, 기술의 의미는 얼마나 쉽게 쓸 수 있느냐보다 누가 왜, 어떻게 쓰는지를 이해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문제는 기술 용어가 어렵다는 데 있지 않다. 프롬프트 엔지니어링, 멀티모달 입력 같은 개념들이 빠르게 보편화되고 있지만, 실은 기술에 익숙한 사람들끼리만 통하는 언어다. 진짜 격차는 기술을 배우는 사람과 기술의 언어에서 배제된 사람 사이에서 발생한다. 낯선 기술 앞에서 질문을 허용하는 분위기조차 사라졌고, 설명을 요청할 여유도 찾기 어렵다. 그 결과 사용자는 점점 말문이 막히고,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일처럼 느껴진다.
AI 시대의 격차는 과거의 디지털 격차와는 다르다. 과거에는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을 몰라도 어느 정도 일상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술을 모르면 곧 손해로 직결된다. 특히, 노동시장이나 교육 환경에서 이 차이는 점점 더 실질적인 결과로 이어진다.
취업 준비를 하는 청년 중 일부는 챗GPT 기반 이력서 도구, 포트폴리오 자동화 도구, 면접 질문 시뮬레이터 등을 능숙하게 활용하며 자신을 '최적화'한다. 반면 이런 도구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이들은 같은 자리에 앉아도 이미 보이지 않는 불리함을 안고 경쟁에 나선다. 마치 경쟁의 룰이 AI에 의해 바뀌었는데, 그 룰북조차 받아보지 못한 채 같은 트랙에 놓여 있는 셈이다.
디지털 인프라가 빠르게 확산할수록, 그만큼 설명의 부재도 더 심각해지고 있다. 사람들은 기술을 '경험'하기도 전에 '이해할 수 없는 시스템' 속으로 던져진다. 예를 들어 공공 서비스에서는 상담원 연결보다 챗봇 응대가 먼저 나오고, 병원 예약조차 AI 음성 안내를 통하지 않고는 어렵게 구성돼 있다.
민원 해결을 위해 전화했더니 '챗봇으로 문의해달라'는 안내만 반복될 때, 우리는 과연 누구를 위한 디지털 전환인지 묻게 된다. 효율성이라는 명목 아래 인간적 소통은 점점 사라지고, 사용자는 어느새 기술에 자신을 맞춰야 하는 존재로 전락한다.
이처럼 AI가 만드는 격차는 단순히 지식의 문제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곧 기회의 격차이다. 누군가는 기술을 활용해 더 많은 가능성을 확보하고, 누군가는 기술에 의해 판단되고 분류되는 객체로 남는다.
프롬프트를 잘 쓰는 사람이 창의적인 사람으로 인식되고, AI가 추천한 경로를 따르지 않으면 비효율적인 사람으로 간주되는 사회에서, 우리는 점점 '기술을 쓸 수 있는가'가 아니라 '기술에 해석될 수 있는가'를 중심으로 평가받게 된다. 기술이 중립이라는 말은 점점 더 허상이 되어간다. 오히려 기술은 누구를 위해 설계되었는가를 묻는 것이 이 시대의 핵심 질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기술을 어떻게 더 잘 활용할 것인지뿐만 아니라, 기술이 누구를 배제하고 있는가를 함께 물어야 한다. 누구나 쓸 수 있다는 주장뿐만 아니라, 왜 어떤 사람들은 쓰지 못하게 되는가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AI 시대의 포용이란 모두가 기술 전문가가 되는 것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기술이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도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설계되고 설명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손윤석 미국 노터데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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