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메이저 시즌…흔들리는 '골프 강국' 자존심
옅어진 '정신력'과 '끈기'…지금 필요한 것 '간절함'
올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의 마지막 메이저 대회였던 'AIG 위민스 오픈'이 아쉬움을 남기며 막을 내렸다. 김아림이 한때 선두 경쟁을 펼치며 희망을 보였지만 최종 4위에 머물며 우승 문턱을 넘지 못했다. 기대를 모았던 마지막 메이저에서도 우승은 불발됐고, 한국 여자 골프는 또 한 번 아쉬움을 삼켜야 했다. 올 시즌 메이저 무대에서의 침묵은 단순한 성적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한국 여자 골프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 징후는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앞서 열린 '아문디 에비앙 챔피언십'에서는 한국 선수 중 단 한 명도 '톱10'에 들지 못했다. 2001년 창설 이후 이 대회에서 한국 선수가 톱10에 오르지 못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때 LPGA 투어를 지배하며 세계 무대를 이끌었던 '코리안 시스터즈'를 떠올리면 믿기 어려운 결과다.
그동안 한국 선수들은 메이저 무대에서 강한 존재감을 과시해왔다. 박세리를 시작으로 박인비, 전인지, 김세영, 유소연, 고진영 등 쟁쟁한 스타들이 우승은 물론, 꾸준히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며 세계 무대에서 활약해왔다. 그러나 올해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시즌 첫 메이저인 '셰브런 챔피언십'을 시작으로 'US 여자오픈' 'KPMG 위민스 PGA 챔피언십' 에비앙 챔피언십, AIG 위민스 오픈까지, 단 한 차례도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다.
문제는 이러한 부진이 일시적인 현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단순히 운이 따르지 않은 한 해라기보다 전반적인 경쟁력 약화가 드러나고 있다. 신예 스타의 부재, 기존 강자들의 침체, 선수 개개인의 기복 등 복합적인 요인이 겹치며 코리안 시스터즈의 위상도 예전 같지 않다.
세계 무대는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미국, 태국, 일본, 중국, 프랑스 등 다양한 국적의 젊은 선수들이 두각을 나타내며 기술·체력·멘털 트레이닝 등 전반적인 수준이 높아지고 있다. 이런 변화의 흐름에 한국이 제대로 대응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기술은 충분하다. 그러나 절박함과 집중력이 예전만 못하다"고 지적한다. 골프의 대중화와 유소년 시스템의 확장은 분명 긍정적인 변화지만, 그만큼 '정신력'과 '끈기'는 옅어졌다는 평가다. 박세리의 맨발 투혼은 단순한 일화를 넘어 한국 골프 정신의 상징이었다. 지금 필요한 것도 바로 그 '간절함'이다.
구조적인 문제도 짚어봐야 한다. 세계 무대를 경험한 베테랑 선수들의 감소는 자연스럽게 글로벌 적응력 저하로 이어졌다. 도전보다는 안정적인 국내 활동을 선호하는 경향이 짙어지면서 세계 무대와의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다. 물론 국내 활동의 안정성도 장점이지만, 세계 정상에 오르기 위해선 분명한 한계가 있다.
팬들의 시선도 변하고 있다. 과거에는 이름만으로도 환호를 받았지만 이제는 냉정한 평가가 따라붙는다. 세계 무대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기를 기대하던 팬들은 점점 "그때가 좋았지"라는 회상 속에 머무르게 된다. 더 이상 '한국 여자 골프'라는 이름만으로는 관심을 끌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번 시즌의 메이저 부진은 단순한 결과가 아니라 '왜 우리는 약해졌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기술과 체력, 멘털, 전략, 그리고 간절함까지 다시 다져야 할 때다. 명예는 과거에 있지만 기회는 지금 여기에 있다. 한국 여자 골프는 이미 세계 최고라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브랜드다. 그 이름을 다시 빛내기 위해 지금은 다시 뛰어야 할 시간이다.
이광호 기자 kwan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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