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에 가족 잃고 포로로 끌려가
괴로움 속에서도 남 도우며 살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선 사람들은 전쟁에 휘말려 죽거나 가족과 헤어지게 되었다, 조선 공격의 선봉에 섰던 다이묘(일본 무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동래를 함락하고 한양을 처음으로 점령했다. 그러다 보니 조선에서 고니시의 악명은 상당해서 임진록을 비롯한 민담이나 사극에서 곧잘 악역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그는 독실한 천주교도였고, 전쟁에 휘말린 조선 고아들을 데려와 키우기도 했다. 그중 하나가 오타 줄리아로, 서울의 어느 양반 집안의 장녀였다가 전쟁으로 가족들과 헤어져서 고니시에게 거두어졌다.
참으로 기구한 일이었다. 줄리아는 고니시 덕분에 목숨을 부지했지만 그렇게 된 원인은 일본의 침략이었다. 이후 줄리아는 일본으로 보내어져서 고니시 부인의 시녀가 되었고, 한자와 일본어 모두에 능숙한 재원이 되었다. 그리고 줄리아는 천주교로 개종하고 줄리아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줄리아는 새로운 고난을 겪게 된다. 160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벌어진 내전(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한 고니시는 처형당하고 가문이 멸망했기 때문이다. 당시 20세 즈음이었던 줄리아는 일본 최고의 권력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녀가 되었다. 조선인이고 고아인 그녀가 살아남았던 것은 총명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도쿠가와는 줄리아에게 수청을 들 것을 요구했고, 또한 종교 금지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줄리아는 모두 거부했고 신앙을 지켰다. 결국 그녀는 오시마, 니지마 섬 등 외딴 섬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그러면서도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돕다가 규수 근처인 고즈시마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몇 년 전 줄리아가 직접 쓴 편지 3장이 발견되면서 그녀의 행적이 좀 더 알려지게 되었다. 야마구치에 자신과 닮은 조선인 남자 포로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쓴 편지였다. 자신이 기억하는 동생의 이름, 신체적 특징을 말하며 '당신이 동생이 맞습니까' 하고 물어보는 일본어로 쓰여있다. '그래도 너만은 부모님 곁에 남아있을 줄 알았는데…'라는 구절에는 짙은 그리움과 전쟁의 아픔이 느껴진다. 다행히 편지를 받은 사람은 남동생이 맞았고, 남매는 감격의 상봉을 하게 되었다.
이 일은 줄리아가 유배를 가기 전에 있었던 듯하다. 남동생은 누나를 만나고, 덕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선물도 받았다. 이후에 남동생은 무라타(村田)라는 일본성을 받았고, 일본 야마구치 하기에 정착해 그 후손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편 줄리아가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녀와 연락을 주고받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의 편지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줄리아는 말년에 귀양에서 풀려나서 나가사키, 오사카 등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줄리아는 정말 기구한 삶을 살았다. 어린 나이에 전쟁에 휘말렸고, 가족과 헤어지게 된 것, 고향을 떠나 일본에서 살아야 했고 원수이자 은인이었던 사람이 죽는 것을 보아야만 했고. 그를 죽게 한 권력자의 시녀가 되는 등 자신이 원하지도 않고 선택하지도 못한 삶을 살아야만 했다.
그러나 줄리아는 닥쳐온 운명 앞에 복종하는 대신 유일하게 허락된 자유인 자신의 마음을 굽히지 않고 저항했다. 힘들고 괴로운 삶을 살면서도, 남을 돕고 자기 뜻을 지켜온 줄리아의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가시밭 속의 장미'라고 불렸고, 일본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지금까지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서 모두 기억되고 있다.
이한 역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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