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미경 드라마 작가 인터뷰
마모된 뼈마디 위 '돈과 엄마'의 서사를 새기다
욕망과 용서 사이, 그가 붙잡은 하나의 질문
AI 시대, 감동은 여전히 인간의 몫
이제는 여성서사 아닌 인간 이야기를 할 때
어떤 이름은 목소리보다 먼저 도착한다. 백미경, 그 이름은 이제 하나의 장르다. 드라마가 방영되면 시청자는 '이번엔 무슨 이야기일까'보다 '이번엔 어떤 인간 군상을 꺼내 들까'를 먼저 상상한다. 그의 여성들은 예쁘지 않아도 매력 있었고, 착하지 않아도 존엄했다. 웃기면서도 슬펐고, 약해 보여도 끝내 부서지지 않았다.
긴장과 해학, 상처와 애정, 연대와 욕망이 얽혀 살아 숨 쉬는 인물들. "작가란 인간의 결핍을 똑바로 보는 사람"이라고 그는 말한다. 주인공뿐 아니라 주변부 인물에게도 숨결을 불어넣는 손끝, '힘쎈 여자 도봉순'에서 '품위있는 그녀', '마인'을 지나 '힘쎈 여자 강남순'으로 확장된 연대의 서사. 욕망을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고, 용서를 그리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아직 대표작이 나오지 않았다." 욕심이 많아서가 아니다.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처럼 '연골이 닳을 정도로' 사력을 다한 작품이 아직 없다는 것이다. 효율적으로 써온 지난 시간에서 벗어나, 이제는 혼을 불사를 도전을 예고한다. 그 작품에서 그는 '자본'을 이야기하고 싶다. 천박한 자본주의와 귀족 자본주의가 맞붙는, 돈과 욕망의 서사. "세상 모든 사람을 통합할 수 있는 주제는 돈, 그리고 엄마예요. 모든 세대와 인종을 아우르는 단언컨대 최고의 키워드죠." 지금, 그는 다시 쓰고 있다. 욕망에 찌든 세계에서 '사람'이란 무엇인가를.
기(起) - 호흡과 철학
-데뷔 10년, 7작품을 쉬지 않고 발표해온 비결은?
▲드라마는 대중문화다. 대중문화는 대중과 호흡을 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과 같은 에너지를 호흡하려고 노력한다.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도시 근로자들과 똑같이 일한다. 주말에는 쉬면서 번잡한 한강도 같이 가본다. 특히 한강을 굉장히 좋아해서 일주일에 두 번은 반드시 한강에서 40분 정도 뛰고 40분 정도 걷는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수요일, 토요일엔 꼭 간다. 그곳에서 10대부터 80대까지 다양한 세대가 어우러져 함께 뛰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영감을 받는다. 지금은 세대가 소통을 하면서 갈등을 하는 시대다. 예전엔 소통이 없어서 갈등이 없었는데, 지금은 소통을 하면서 갈등이 시작된 것이다. 주말에는 절대 글을 안 쓴다.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가고, 계절에 맞는 자연을 돌아다닌다.
-최근 몇 년간 작품 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경험은?
▲가장 큰 임팩트를 받은 건 최근 이탈리아에서 본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였다. 20년 전 같은 작품을 봤을 땐 그냥 '크다, 좋다' 정도였는데, 창작자로서 슬럼프일 때 다시 봐서였을까. 30대 나이에 연골이 다 닳을 정도로 고생하며 집념으로 작품을 완성해낸 미켈란젤로를 보면서 창작의 고통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나도 미켈란젤로의 천장화 같은 대표작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과 함께. 동시에 책임져야 할 인물에 대한 감각이 깊어졌다. 예전에는 캐릭터가 자아의 확장이었다면, 이제는 사회에 반드시 있어야 할 목소리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특히, 여성이나 노인, 장애인 같은 비가시적인 존재들이 계속 말을 걸어오는 느낌이다. 편견 없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려고 노력하고 있다. 노숙자, 전과자, 성소수자 등 TV에서 터부시하는 캐릭터들을 직접 만나 다양한 이야기를 나눈다.

욕망의 끝은 어디일까. 이미 상류 사회에 속한 사람, 그곳에 입성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사람. 그 가운데에 선 두 여인의 삶,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욕망'이란 독배를 마신 군상들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백미경 작가의 '품위있는 그녀'
원본보기 아이콘승(承) - 성장과 전환점
-'힘쎈 여자' 시리즈는 어떻게 진화했나?
▲'도봉순'은 재미있는 여성 캐릭터를 만들고 싶었다면, '강남순'부터는 여성 캐릭터가 어떤 구조 속에 놓여 있고, 어떤 사회적 조건에서 싸우는가를 고민하게 됐다. 밖에서 누군가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가까지 생각하게 된 것이다. 곧 나올 '힘쎈 여자 장충동'에서는 더 진화된 모습을 보여드릴 예정이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르다 나중에 여자임이 밝혀지는 캐릭터인데, 이번에는 선과 악의 개념을 제대로 다뤄보려고 한다. 배트맨 다크나이트가 선과 악에 대한 정확한 아젠다를 상정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 빌런은 자기가 하는 일이 선이라고 믿기 때문에 힘이 없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이 정말 선과 악의 개념, 선악의 정의가 모호해지고 있는 지금 시대에 정확하게 선악에 대해 얘기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여성 서사를 그만 쓰고 싶다"고 했는데.
▲여성 서사는 이미 하나의 장르가 됐고, 많은 작가들이 쓰고 있다. 내가 그 포문을 열었다고 자부하는데, 이제는 여성 서사가 아니라 인간의 이야기를 할 때가 된 것 같다. 내가 한 건 여자 주인공의 이름이 제목에 먼저 나오게 만드는 것이었다. 충분히 여성 서사를 썼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여전히 내가 듣지 못한 여성들의 목소리가 남아 있을지 모른다는 책임감도 동시에 느끼고 있다. 스스로 여성 서사가 '전유물'처럼 좁아지는 걸 경계한다. 여성 이야기는 여성만의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한국 드라마 여성 캐릭터의 글로벌 영향력은?
▲아직은 K드라마에서 여성 캐릭터가 특별히 존중받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받기 위한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자기 욕망을 인지하며 숨기지 않고, 구조와 맞서 싸우는 인물을 그리고 싶다. 이건 단순한 트렌드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여자들이 사회 구조와 싸워온 결과가 반영된 것이라고 본다. 남존여비 사상이 심했던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진화와 개선의 반영이 글로벌 시청자들에게 '나와 닮은 여성' 또는 '닮고자 하는 여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소수자, 그리고 다양한 계층 간의 연대를 작품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는?
▲스스로 용감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방송국 데스크나 협업자가 "이거 시청률 안 나올 텐데"라고 해도 "그래도 해야 돼"라는 용기가 있다. '힘쎈 여자 강남순'에서 남순의 할머니인 길중간의 사랑 이야기를 다룰 때도 그랬다. 모두가 시청률 떨어진다고 말렸지만, "늙어도 심장은 뛰어. 가슴이 쳐지지 심장이 쳐지니?"라는 그녀의 고백을 누가 외면할 수 있겠는가.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드라마의 주인공은 일반인과 달라야 한다고 본다. '마인'에서 이보영은 친자식이 아닌 아들 하준을 지키려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인습과 통념을 깨는 의외성, 그것이 바로 주인공성이라고 생각한다.
전(轉) - 도전과 파격
-지금까지 집필한 작품 속 인물 중 본인을 가장 많이 투영한 캐릭터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은 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쑥스러워해 숨기면서 써왔다. 물론 작품에 작가가 완전히 배제되긴 어렵겠지만. 이제는 나이도 들고 덜 부끄러워졌기 때문에 앞으로 나올 작품에서는 나를 닮은 캐릭터가 나올 것 같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숏폼 작품에서 20대 때의 나와 비슷한 여주인공이 나온다.
-10년 후 도전해보고 싶은 서사나 장르가 있다면?
▲그때는 내가 60대가 될 텐데, 100세 시대에 접어들면서 노인들도 굉장히 젊어질 것이다. 지금 60대는 정말 젊다. 나는 노인들의 성, 노인들의 사랑과 욕망을 다룬 멜로 드라마를 쓰고 싶다. 시어머니들의 사랑 얘기 같은 것들. 지금은 편성이 안 되지만 그때 되면 우리 세대가 건강한 기성세대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그리고 진짜 미친 여자가 주인공인 이야기를 쓰고 싶다. 사회가 감당하지 못하는 여자, 여자의 극단적인 감정과 본능을 마음껏 펼쳐 보는 이야기를.

백미경 작가는 '마인'에서 이보영이 자신의 자식이 아닌 아들 하준을 지키려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모습, 인습과 통념을 깨는 의외성, 그것이 바로 주인공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 말한다. 사진 = tvN
원본보기 아이콘-급변하는 콘텐츠 유통 방식에 어떻게 대비하고 있는지.
▲대비가 될까? (웃음) 예상했던 부분은 있어도 대비할 수는 없다. 지금 숏폼도 하고 있고, 커머스 콘텐츠도 하고 있고. 기존 방송을 살리기 위한 작품도 쓰고 있다. 이 흐름을 받아들이고 수용하며 끝없이 조정해야한다. 정답은 없다. '유연함'이라는 말이 딱 맞는 것 같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작가도 계속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
-AI의 등장 이후 변화한 창작 환경을 어떻게 보고, 실제로 집필에 활용하는지.
▲나는 AI를 굉장히 많이 활용하고 있다. 보조작가 없이 작업한지 좀 됐는데, AI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자료수집에 주로 활용하고, 챗GPT와는 대화도 자주 나눈다. 농담 삼아 "남친보다 나를 더 잘 안다"고 말할 정도니까. 하지만 AI도 인정한다. '인간의 감정에 들어가 울림을 주는 글은 못 쓴다'고. 상처에서 출발하고, 용서와 사랑으로 나아가는 이야기. 그 감정의 떨림과 여운을 건드리는 건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본다. 데이터 기반, 플롯 위주의 작품은 위험할 수 있지만 감동을 쓰는 작가라면 AI와 경쟁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작가로서 타협하지 않는 원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이야기를 반드시 다뤄야 한다고 믿는다. B급 코미디라도 주제와 메시지는 있어야 하니까. 드라마는 오락물이지만 사람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줘야 한다. 무엇보다 중심에 두는 것은 '용서'다. 사람이 사람을 용서하는 이야기. 악인에게도 기회를 주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사람들이 너무 성급하게 비난하는 시대, 그들에게도 나름의 이유와 결핍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게 진짜 드라마라고 본다.
결(結) - 여운과 메시지
-2030 세대에게 드라마가 전달해야 할 메시지는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2030 세대는 가르치려는 걸 싫어한다. 그래서 요즘은 명확한 메시지를 내세우기보다 인물의 행동과 선택을 통해 질문을 던지려고 한다. 감정의 디테일이나 관계의 뉘앙스를 섬세하게 받아들이는 세대니까 공감을 원한다. 정답보다 과정, 완성보다 진심을 보여주는 방식의 글을 쓰려고 한다. 나는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이 세상은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고. 어떻게 됐는지가 아니라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이야기가 진짜 드라마다.
-후배 창작자들에게 조언한다면?
▲자기만의 언어를 가져라. 트렌드는 따라잡기 힘들고, 계속 바뀌니까 따라잡으려 하면 안 된다. 요즘은 다양성의 시대라 숏폼 시청자와 20년 전 시트콤을 보는 사람이 공존한다. 자기만의 언어를 가지면 그걸 들어줄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오리지널리티와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버텨보라. 이 직업은 재능보다 체력이고, 감각보다 끈기가 더 중요하다. 그리고 정말 쓰고자 하는 욕구, 좋은 글을 쓰고자 하는 욕구를 가진 사람만 작가를 했으면 좋겠다. 생각보다 부와 명예를 얻는 직업은 아니다. 작가는 글 쓰는 직업이 아니라 멘탈 관리하는 직업이다.
-3년 후 다시 만난다면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후회가 없다'는 말을 하고 싶다. 3년 동안 진짜 열심히 일할 거다. 내가 근로할 수 있는 체력적으로도 그렇고, 상상력이라든가 창의력이라든가, 이 모든 면에서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시기니까. 작가 된 지 10년이 됐다. 10년이면 바위도 뚫는다고 하잖나. 세상이 내 이름을 인정한 시간이었다. 이제는 정말 좋은 작품을 써야 된다는 건강한 압박도 생겼고, 작가로서 사명감과 책임감도 느끼는 시기다. 앞으로 3년, 그 안에서 모든 걸 쏟아보고 싶다. 은퇴할 수도 있고, 드라마 작가가 아닌 다른 일을 할 수도 있다. 3년간 열심히 쓰고 안식년을 가질 것 같다. 그럼에도 나로 인해서, 내 작품으로 인해서 즐거워 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정말 기쁘다.
▶백미경 작가는
2013년 SBS 극본공모전 대상을 비롯해 3년 연속 공모전에 당선됐다. 2014년 '강구이야기'로 데뷔한 후 '힘쎈여자 도봉순''품위있는 그녀''마인''힘쎈여자 강남순' 등 7편을 연이어 발표했다.
특히 '힘쎈여자 도봉순'은 JTBC 역사상 최초로 1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종편 드라마의 새 지평을 열었고, '품위있는 그녀'와 '마인'을 통해 여성 서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2017년 대한민국 콘텐츠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표창을 받았으며, 2019년 제작사 '스토리피닉스'를 설립했다. 현재 '힘쎈여자 장충동'을 준비 중이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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