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보이' 세관 공무원 위장한 냉혹한 빌런
28년차 배우 "연기란 사람을 이해하는 일"
"참 많은 정의가 참 많은 악을 이기길 바라봅니다."
JTBC 드라마 '굿보이' 종영을 앞두고 17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프레인빌라에서 만난 오정세는 직접 쓴 손편지를 건넸다. 흰 종이에 단정하게 적힌 이 한 문장이 배역을 어떤 태도로 마주했는지 말해줬다. 그는 "악에 서사를 부여하고 싶지 않았다"며 "민주영이라는 인물이 그저 괴물처럼 다가가길 바랐다"고 전했다.
오정세가 연기한 '민주영'은 중고차, 약물, 총기 밀매 등 온갖 범죄로 인성시를 뒤흔드는 인물이다. 평범한 얼굴과 나긋한 목소리로 살벌한 협박을 던지는 이중적인 면모를 지녔다. 그는 "보통 빌런은 후반에 정체가 드러나는데 이번엔 초반부터 모습을 드러내는 인물이었다. 어떻게 디자인해야 할지 고민이 컸다"고 말했다.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때부터 후반부로 갈수록 왼쪽과 오른쪽 얼굴이 마치 '지킬 앤드 하이드'처럼 극단적으로 변해가길 바랐다고 한다. 민주영은 굿보이 특수팀과 대립하며 점점 가면이 벗겨지고 괴물의 형상으로 바뀌어간다. 그는 "처음엔 셔츠 단추를 목까지 잠그는 단정한 모습이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복장과 인상이 무너진다"며 "눈썹 위에 난 세로 상처도 빌런으로서 상징적인 흔적이 되길 바랐다"고 설명했다.
극 중 민주영은 고가의 옷을 입지만 브랜드를 드러내지 않는다. 착용한 의상은 평범해 보이지만 사실은 수백만원짜리였다. 오정세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자기 확신이 강한 인물"이라며 "자신이 지배하는 세계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는 확신이 무기였다"고 해석했다.
악역이지만 서사나 동정은 철저히 배제했다. 그는 "민주영을 이해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며 "검은돈과 권력은 평범한 사람도 괴물로 바꿀 수 있다는 경고 정도만 남기고 싶었다"고 말했다. 금장 시계를 받고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도 "작은 유혹 하나가 인간을 어떻게 변하게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덧붙였다.
"주인공 윤동주(박보검)와의 관계 역시 복잡하게 설계했어요. 초반엔 관심 밖 인물이었지만 점점 레이더망에 들어왔죠. 장난감을 관찰하듯 지켜보다 어느 순간 세계가 금이 가기 시작했어요. 민주영이 결국 자신의 세계가 무너짐을 감지하고 발버둥 치는 인물로 변해가는 거죠."
액션에도 공을 들였다. 그는 "굿보이 팀은 통쾌한 액션이지만 민주영은 정반대로 잔 동작으로 섬뜩함을 주고 싶었다"고 했다. 폭력 장면에서도 "툭 치는 정도지만 표정과 동선으로 공포를 만들려 했다"고 말했다.
오정세는 '악인'이어서 출연한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다음 작품에 어떤 손이 내밀어질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코미디든 악역이든 결국 삶처럼 만나는 것 같다"며 "기대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처럼 작품도 그렇게 다가온다"고 말했다.
데뷔 28년 차. 그는 1997년 영화 '아버지'로 데뷔해, 2010년 '부당거래'의 김 기자로 얼굴을 알렸다. 긴 무명 시기를 지나 '동백꽃 필 무렵'(2019), '사이코지만 괜찮아'(2020), 영화 '거미집'(2023) 등에서 굵직한 배역을 맡아왔다. 그는 "처음부터 좋은 배우가 될 자신은 없었지만 오래 할 자신은 있었다. 40~50년쯤 지나면 지금보다는 나은 배우가 돼 있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고 떠올렸다.
"그때도 즐겁게 했고 지금도 즐거워요. 앞으로 작품이 없어질지 잊힐지 모르지만, 오래 하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배우라는 직업을 통해 누군가의 하루에 스며들 수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신기해요."
그는 "작품이 많아도 적어도 관심을 받을 때도 아닐 때도 결국 중요한 건 이 일을 오래 즐기며 계속해 나가는 것"이라며 "배우 오정세라는 사람도, 그가 연기한 인물들도 계속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오정세가 생각하는 '연기'는 결국 '사람'을 이해하는 일이다. 그는 "인간에 대한 애정 없이 사람을 설득하는 연기를 할 수 없다는 걸 점점 더 절감하게 된다"고 했다. 누군가의 고통을 대변하고 어떤 얼굴에는 기쁨을, 또 어떤 얼굴에는 경각심을 남기는 일이 배우라는 직업을 특별하게 만든다고 덧붙였다.
"제가 연기한 어떤 인물이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었다는 말을 들을 때 이 일을 계속해야 할 이유가 생겨요. 그럴 때마다 연기는 혼자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달아요. 함께 숨 쉬며 바라봐주는 누군가가 있어 가능해지는 일이겠죠. 관심을 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표현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서 연기하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작은 감정 하나라도 진심으로 전달되고 그게 어떤 하루의 온도를 바꿨다면 그걸로 충분해요."
이이슬 기자 ssmoly6@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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