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캄보디아 국경 충돌이후
패통탄 "훈센 삼촌" 통화 유출
아세안 엘리트 가문 초국적 연결
군부 강한 반발, 정치 주도권 회복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정치를 외부에서 보면 혼란스럽고 두서없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정한 법칙이 있다. 최근 태국과 캄보디아를 뒤흔든 패통탄 친나왓(38)과 훈센 전 총리 간의 전화 통화 유출 사건은 그 대표적 사례다.
무엇보다 아세안 정치의 핵심은 엘리트 정치 가문의 존재, 그리고 각국 정치 엘리트 간의 초국적 밀착 네트워크에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각자 국가의 제도 위에 서 있는 권력 집단으로 기능하며, 위기 상황에서는 국가를 초월한 방식으로 정보를 교류하고 정세를 조율한다. 그리고 이들을 견제하고 통제하는 세력은 다름 아닌 군부와 정보기관이라는 대목이다.
아세안을 뒤흔든 한 통의 전화
6월15일, 패통탄 총리와 훈센 전 총리 간의 전화는 5월 말 태국·캄보디아 국경 충돌 직후 이루어졌다. 그녀는 훈센을 "삼촌"이라 부르며 군부의 강경 대응을 자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삼촌이라는 호칭은 동남아 문화권에서는 자연스러운 호칭일 수 있으나, 현직 총리가 외국 전 총리와 사적으로 긴밀한 관계 속에서 민감한 안보 사안을 논의했다는 점은 곧 정치적 문제로 비화했다. 보수 진영은 이를 '외세와의 결탁'이라 규정했고, 헌법재판소는 7월 초 그녀의 총리직을 정지시켰다. 이로 인해 주가지수도 급락하며 경제적 충격도 뒤따랐다.
실제로 훈센과 아버지 탁신은 오랜 친분이 있다. 탁신이 쿠데타로 실각한 뒤 캄보디아에 머물렀던 과거는 이들의 정치적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만들었다. 이번 사건은 단순한 외교적 실수라기보다는, 동남아 엘리트들이 국가 경계를 넘어 맺고 있는 비공식 권력 네트워크의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필리핀의 마르코스·두테르테 동맹, 태국·캄보디아의 친나왓·훈센 라인은 모두 각국 지도자라기보다 '동남아 1% 권력 계급'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밀착은 주권의 희석과 민주적 통제의 약화를 초래한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아세안 정치가 '국가 간 관계'가 아니라, '엘리트 간 관계'로 작동하는 구조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과연 누가 유출했는가?
이번 사건의 핵심 의문은 통화 유출의 계기와 과정이다. 훈센은 6월18일, 자신이 직접 통화를 녹음하고 페이스북에 올렸다고 밝혔다. 그는 "오해를 막기 위한 조치"라고 해명했지만, 실제로는 공개 이전에 이미 80여명의 고위 캄보디아 인사들에게 녹음 파일을 배포했다는 점에서 의도적 유포 가능성이 짙다.
특히 패통탄이 자국 군사령관을 "상대편 군 지휘관"이라 언급한 내용은 군부에 강한 반발을 일으켰다. 대화 내용이 공개되자마자 군부와 보수 정당은 빠르게 움직였고, 상원 의원 36명이 헌재에 제소했다. 이 반응 속도는 이상할 정도로 빠르다. 이는 태국 정보기관(NIA 등)이 통화 내용을 사전에 감지하거나, 최소한 사후에 전략적으로 활용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일부는 훈센이 아닌 태국 군부가 통화 공개를 유도했거나, 훈센에게 외교적 부담을 암묵적으로 전달했을 수 있다고 분석한다. 훈센이 왜 굳이 오랜 정치적 우군인 친나왓 가문에 타격을 줄 만한 행위를 했는지 설명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훈센 개인에게도 정치적 이해관계가 작용했을 수 있다. 훈센의 아들 훈 마넷이 총리직을 수행하는 가운데, 자신의 영향력을 아세안 지역에서 과시하고자 하는 전략적 시도였다는 해석도 있다. 즉, 이번 공개는 단순한 외교적 실수가 아니라, 국내외를 겨냥한 일종의 '파워 시그널'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태국 군부와 친나왓 가문의 구조적 충돌
지난 20년의 태국 정치의 핵심은 탁신 가문이 꾸준히 선거에서 승리하지만 군부, 사법부, 왕실을 중심으로 한 보수 엘리트 네트워크에 의해 번번이 좌절된다는 점으로 특징된다. 2006년, 2014년 쿠데타는 물론, 정당 해산과 정치인 자격 박탈 등 제도적 견제가 반복돼 왔다. 이는 태국에서 '민주적 정당성'과 '엘리트 정당성' 사이의 단절을 보여준다. 탁신 가문은 민중에게는 지지를 받지만, 엘리트 체제에서는 늘 이질적인 존재다.
친나왓 가문은 북부와 동북부의 탄탄한 지지 기반을 바탕으로 대중적 정당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군과 관료조직, 사법 체계에 기반을 둔 실질 권력은 장악하지 못했다. 따라서 선거 승리는 항상 불안정하며, 체제에 의해 언제든 제거될 수 있는 불안한 승리다. 이번 통화 사건은 그 취약한 구조를 다시 한번 증명한 셈이다.
군부와 정보기관은 공개적 탄압보다는 '기다리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는 해석도 있다. 감시, 이미지 훼손, 사법적 압박 등을 통해 친나왓 가문이 스스로 무너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특히 패통탄 이후 세대는 더욱 취약하다는 판단 아래, 다음 총선 혹은 내부 분열을 기회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태국 사회 내 보수층 여론도 일정 부분 군부의 입장을 뒷받침하고 있으며, 대중의 분열된 태도 역시 군부 전략에 힘을 실어준다. 군부는 탁신 체제를 체제 위협 요소로 간주하며, 민심과 충돌하더라도 국가 엘리트 체제의 존속을 우선시하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탁신 가문 정치의 재몰락
패 통탄 총리는 국경 분쟁을 빠르게 해소하기 위해 아저씨 훈센과의 통화를 정권 유지의 도구로 활용했다. 하지만 이는 친나왓 가문을 흔드는 결정적 빌미가 됐다. 이번 정직은 단순한 법적 절차가 아니라, 태국 정치에 내재한 구조적 모순을 보여준다.
패통탄 총리는 다시 한번 군부가 정치의 주도권을 회복하는 계기를 제공했고, 친나왓 가문은 또 한 번 체제의 벽 앞에 멈춰 섰다. 아세안의 정치는 오늘도 '민주주의와 엘리트주의 사이'에서 계속 출렁이고 있다. 이번 사건은 단순한 외교 해프닝이 아니라, 그 깊은 균열을 드러낸 정치적 단층선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늘 그렇듯, 태국 군부가 있다는 게 확인된 셈이다.
정호재 아시아비전포럼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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