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등장 이후, 한국 일러스트레이터 생존기
AI가 그린 이미지와 저가 경쟁 현실화
'인간인 척'하는 AI 작업물에 신뢰 훼손도
기업 홍보 영상을 외주받아 제작하는 프리랜서 류모씨(32)는 밑그림의 대가다. 그가 태블릿 흰 화면 위에 전자펜을 덧댈 때마다 인물, 건물, 도시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류씨가 그린 밑그림을 바탕으로 그와 함께 일하는 다른 프리랜서들이 영상의 배경, 인물 구도 등을 잡는다. 류씨의 그림이 곧 모든 콘텐츠의 시작점이자 기반인 셈이다. 그의 일필휘지 손놀림 한 번에도 무수한 고민이 녹아 있다.
2시간을 내리 몰입했을까, 마침내 류씨는 '콘티(작업물의 전반적인 콘셉트를 잡아주는 밑그림)' 한 장을 완성했다. 이 정도면 업계에서도 인정받는 속도라고 한다. 하지만 그가 챗GPT에 이 콘티를 올린 뒤 "비슷한 그림체로 한 장을 더 그려달라"고 주문하자, 화면엔 불과 3분 만에 그럴싸한 그림이 나타났다.
"물론 이 그림을 진짜 작업용으로 사용할 순 없죠. 일반인 눈에는 비슷해 보이겠지만, 실무자 입장에선 엉성한 면이 많거든요. 문제는 AI가 고객들의 인식을 바꿨다는 거예요. 이제는 작업 스케줄을 정할 때 고객이 'AI는 금방 그리던데 시간 좀 줄일 수 없냐'는 말부터 먼저 꺼내요. AI와 경주를 하게 된 거죠."
마음이 맞는 프리랜서들과 팀으로 움직이는 류씨는 "저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라고 했다. 밑그림은 기업 홍보 영상 제작의 일부분이라 설령 AI가 일을 대체한다 해도 다른 작업에 투입될 수 있어서다. 그는 "지금 정말로 불안함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림 실력 하나로 먹고살던 순수 일러스트레이터들"이라고 전했다.
업계의 불청객, 생성형 AI
일러스트레이터들이 활동할 수 있는 국내 미술 시장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기업이나 정부로부터 위탁 계약을 따내는 상업 시장, 그리고 개인이 취미·소장용으로 화가에 그림을 의뢰하는 일명 '커미션' 시장이다.
상업 시장은 의뢰 단가가 높지만 팀 단위 업무가 많고, 경쟁도 치열해 일반 일러스트레이터들이 기회를 잡기 어려운 곳이다. 그래서 오늘날 대부분의 일러스트레이터들은 커미션 시장에서 취미용 그림을 수주한다. 단가는 10~20만원 안팎으로 높지는 않지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생성형 AI가 미술 시장까지 침투하면서 오늘날 일러스트레이터들은 AI 화가와 직접 경쟁해야 하는 위치에 몰렸다.
필명 'H'로 활동하는 5년 차 커미션 일러스트레이터는 2020년대 초부터 커미션 시장에서 AI 그림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누구나 퀄리티가 어느 정도 보장되는 그림을 '무료'로 뽑을 수 있다면 혹하지 않겠나"라며 "(AI 그림이 커미션 시장을 파고드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라고 토로했다.
H는 과다 경쟁으로 포화 상태였던 커미션 시장이 AI 등장으로 무너지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일러스트레이터를 배출하는 학원이 늘어났고, 누구나 접할 수 있는 동영상 강의도 넘쳐난다. 누구나 조금만 노력하면 일정 수준의 실력을 갖출 수 있게 됐다"며 "생계형 커미션 일러스트레이터들은 그동안 조금씩 단가를 낮춰 경쟁력을 유지해 왔는데, AI가 등장하면서 시장이 완전히 망가졌다"고 전했다.
AI, 시장 신뢰에 균열 만들다
AI가 일러스트 업계에 미친 파장은 단가 경쟁에서 그치지 않는다. 일반 소비자가 사람 전문가와 AI 가 그린 작업물을 점점 더 구분하기 어려워지면서, AI 생성 그림을 일러스트레이터의 그림으로 속여 비싸게 판매하는 일도 늘고 있다. 사기 거래가 늘어나면서 커미션 시장 내 고객과 일러스트레이터 사이의 신뢰까지 흔들리고 있다.
H는 "커미션을 신청한 일부 고객 중에는 전문가가 그린 작품을 AI가 그린 것으로 의심해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 저격 글을 올리거나, 이 때문에 일러스트레이터가 직접 해명해야 하는 일이 자주 벌어진다"며 "실제로 AI가 만든 것을 속여 판매하다 적발돼 사과문을 올리는 경우가 많아지니 생기는 일"이라고 전했다. 그는 "전반적으로 AI 등장으로 피해를 보는 일이 많아졌다"며 "고객들에게 의심받고, 일일이 해명을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생계형 일러스트레이터에겐 부담"이라고 토로했다.
평소 그림 그리는게 좋아서 업계에 뛰어들었다는 H는 AI 등장으로 점차 가혹해지는 시장에서 생계형으로 살아남기 위해 마음을 다잡고 있다.
"일감은 언제나 한정적인데, 그림 그리는 사람(혹은 AI)은 빠른 속도로 늘어나는 것을 느껴요. 주문을 받아도 항상 긴장할 수 밖에 없죠. AI 등장으로 시장이 무너지고 있어 언젠가는 이 일을 계속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살아갑니다."
임주형 기자 skepped@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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