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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판정 받고 일하는 기분"…생존 기로에 선 사람들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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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전환의 길]
Ⅰ. 에너지 전환이 몰고 온 갈등
탈(脫)석탄→신재생에너지 전환 과정에 소외된 사람들

국제 사회는 산업과 노동의 전환이 맞물려 있는 기회와 위기 속에서 누구도 배제되지 않아야 한다는 '정의로운 전환'을 에너지 전환의 원칙으로 제시한다. 국제노동기구(ILO)는 2015년 '기후위기 대응이라는 대전환이 일부 계층에게만 희생을 강요하지 않도록 정부·기업·노동자가 협력해 공정한 방식으로 진행해야 한다'는 가이드라인을 채택했다. 이미 제정된 탄소중립기본법(2021)에도 정의로운 전환은 명시돼 있다.
하지만  탄소중립 국가로 나아가기 위해 석탄발전소를 줄이고, 해상풍력을 확대하고 있는 한국 정부는 에너지 전환 추진 과정에서 석탄 노동자들과 어민·지역 주민들의 참여 없는 형식적 협의, 일방적 정책 집행으로 비판 받고 있다. 전환의 현장에 있는 사람들을 배제한 채 이뤄진 에너지 전환은 과연 옳은 일일까 의문이 남는다.

아시아경제는 기획 '정의로운 전환의 길'을 통해 정부가 추진 중인 탈석탄 이행과 해상풍력단지 설치 과정에서 맞닥뜨린 갈등을 짚어보고, 앞서 간 영국·프랑스·폴란드의 정의로운 전환 사례를 통해 이들이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를 보도할 계획이다.

"시한부 판정을 받고 일하는 기분이죠."


충남 태안화력발전소 1차 협력사에서 14년째 일하고 있는 박종현 금화피에스시(PSC) 과장(37)은 앞으로 있을 발전소 폐쇄가 실직으로 이어질까봐 늘 조마조마하다. 터빈팀에서 펌프 정비를 담당해 온 박씨는 펌프에 이상이 생기면 베어링을 교체하고, 오일이 변색하면 이를 교체하는 작업을 해왔다. 한때 화력발전소는 여름철이면 비상근무까지 할 정도로 국내 전력 생산의 중심이었지만, 탈탄소 시대가 도래하면서 전환기가 찾아왔다.

정부는 2016년 파리협정에 공식 가입하면서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을 2018년 대비 40% 감축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기 위해 올해 12월 태안 1호기를 시작으로 석탄화력발전소를 연쇄적으로 폐쇄할 예정이다. 발전소가 폐지되면 1·2차 협력사도 운영이 어렵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지난 3월 발표한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2024~2038년)에 따르면 원별 발전량은 2023년 기준 석탄과 원전이 각각 31%, 액화천연가스(LNG) 27%, 신재생 10%를 차지하고 있다. 2038년까지 석탄은 12.9%로 낮추고, 신재생은 26.0%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목표다.


발전소와 협력사 노동자들을 위한 전환 대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문제는 실효성이었다. 박 과장은 "고용노동부에서 실시한 직업 전환 교육도 들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면서 "태안에서 보령까지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가봤는데, 지금 하는 일과는 전혀 관계없는 아이스크림 공장이나 자동차 공장에 일단 가서 일해보라는 얘기를 들으니 해당 교육이 체계적이지 못하다는 생각만 들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2025년 6월 30일 폐광한 강원도 삼척시 대한석탄공사 도계광업소. 강진형 기자

2025년 6월 30일 폐광한 강원도 삼척시 대한석탄공사 도계광업소. 강진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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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하동화력발전소에서 근무하는 김영구 한국플랜트서비스(HPS) 하동사업소 지부장(49)은 2027년 3월부터 시작될 발전소 폐쇄가 가족과의 이별로 이어질까봐 두렵기만 하다. 김 지부장은 "또 다른 화력발전소가 있는 지역으로 일방적으로 가라고만 한다면 가족과 함께 사는 직원들에게는 큰 부담이지 않겠느냐"며 "스무살이 된 딸이 기후위기 관련 책을 보고 요즘 제 걱정을 그렇게 한다"며 말끝을 흐렸다. 그는 재고용 보장이 되지 않는다면 실업급여, 생활지원금 등 대책을 정부에서 마련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산업의 종말과 함께 남겨진 사람들은 생존의 갈림길에 서 있다. 노동자들은 발전소 폐쇄를 이유로 신규 인력을 뽑지 않아 현장은 늘 인력이 부족한 상황으로 이는 사고 위험을 높인다고 전했다. 화력발전소 비정규직노동자들은 발전소 재하청 노동자 고(故)김충현씨의 산재 사망 이후 매주 서울에서 집회를 벌이는 중이다.


지난달 30일 마지막 남은 국영 탄광이었던 강원 삼척 도계광업소 폐광 이후 일할 곳이 없어진 주민들은 하나, 둘씩 삶의 터전을 빠져나가고 있다. 정부는 삼척 폐광지역에 지정면세점, 중입자가속기 클러스터 설치와 관련해 1년 6개월째 예비타당성조사를 진행 중이지만 결론을 내지 못했다. 김광태 강원 삼척 도계읍번영회장은 "대한석탄공사까지 이미 폐쇄해서 지역 주민들은 노동자 없는 생존권 싸움을 벌여야 한다"면서 "지역의 현실적인 부분이 반영되지 않은 정부 대책은 좌절만 준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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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탄발전소가 폐쇄되는 동시에 해상풍력을 중심으로 한 신재생에너지 사업은 속도를 내는 중이다. 탄소중립 이행을 위한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 신재생에너지 확충은 필수적이다. 제11차 전기본에 따르면 정부는 오는 2029년까지 풍력 발전 설비 용량을 540.2%, 태양광 발전 설비 용량은 75% 늘릴 계획이다. 지난 2월 해상풍력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관련 산업은 더욱 탄력이 붙었다.


그러나 어민들은 평생 삶의 터전이었던 바다를 빼앗길까 두려움에 떤다.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에너지공단이 주관한 '2025년 대규모 해상풍력 단지개발 지원사업'에 전남 고흥군이 최종 선정되면서 인근 해역에 2기가와트(GW) 규모 해상풍력 발전단지 조성을 위해 사전 타당성 조사가 진행 중이다. 전남 고흥군 시산도 앞바다에서 김 양식을 하는 김성수씨(49)는 "수십 차례 설명회에서 수백번 반대 의사를 밝혔지만, 주민 의견은 철저히 무시된 채 일부 대표자 서명만으로 산업부 발전 허가가 내려졌다"면서 "어민들과의 진지한 대화는 없었고, 환경조사라는 명목으로 사업자들이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주민 간 갈등까지 조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남 영광군 백수해안도로에서 바라본 영광풍력발전 단지. 강진형 기자

전남 영광군 백수해안도로에서 바라본 영광풍력발전 단지. 강진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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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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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주 기자 ecolhj@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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