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무구조도(Responsibilities Map). 금융회사가 경영진별로 내부통제의 책임영역을 사전에 정해 놓은 문서다. 책무기술서와 책무체계도로 구성된다. 금융사고 발생 시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겠다는 취지에서 도입됐다. 이름도 생소한 이 문서가 금융권을 뒤흔들고 있다. '금융판 중대재해처벌법'이 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화살은 이미 시위를 떠났다. 금융지주와 은행은 올 1월 도입해 시행 중이다. 3일부터는 금융투자사(자산총액 5조원 이상·운용재산 20조원 이상)와 보험사(자산총액 5조원 이상)에도 제도가 도입됐다. 이어 내년 7월3일부터는 나머지 금융투자사·보험사와 여신전문금융사(자산총액 5조원 이상), 상호저축은행(자산총액 7000억원 이상)에 책무구조도가 마련되고, 내후년 7월3일부터는 전 금융권에 도입된다.
지난 4월 말 만난 A은행 B행장은 하소연을 했다. 문제의 책무구조도를 4개월가량 경험한 터다. "등기임원도 아니고, 집행임원급 인사를 하는데 책무구조도를 수정하고, 이사회에 올려 승인받고, 금융감독원에 보고해 심사받아야 하고. 이런 절차를 거쳐야 하는 인사를 한 주에도 수없이 하는데, 매번 이렇게 해야 하는 게 말이 되나요."
지난 5월 중순 만난 C증권 D대표도 한걱정을 하고 있었다. 한 달 반 뒤(7월3일)에 가동할 책무구조도 때문이었다. "증권사 책무구조도는 은행과는 또 다른 얘기입니다. 은행은 예금과 대출이 대부분으로 상품구조가 단순합니다. 책무구조도도 복잡하지 않습니다. 반면 증권사는 상품이 다양하고 복잡한 데다 고위험 상품도 많아 사고에 더 취약합니다. 이걸 일일이 다 적시해야 하니 책무구조도도 그만큼 복잡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니 금융투자사(증권사) 책무구조도 작성은 보통 일이 아니다. '중복, 편중, 누락이 없어야 한다'는 준칙을 따르다 보니 C증권사 책무구조도의 책무 수는 무려 1만300여개까지 늘어났다. 그런데도 걱정이다. '혹시 놓친 건 없을까?' 노이로제 걸릴 판이다. 여기에 새 비즈니스가 추가되면 걱정은 더 늘어난다. D대표는 "새 비즈니스를 기존 책무와 조화시켜 책무구조도에 반영해야 하는데, 이게 보통 복잡한 일이 아니다" 했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B행장의 하소연을 전하자, D대표는 100% 동감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인사권을 침해하는 심각한 사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인사 또는 조직개편 때마다 '책무구조 수정→이사회 보고 및 승인→금감원 보고 및 심사'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당국이 여러 이유로 수정 내지 보완 요구를 하면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표가 인사나 조직개편도 마음대로 못하고, 하더라도 적기를 놓칠 수밖에 없는 구조에서 과연 회사 경영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감독당국에도 보통 일이 아니다. 수많은 금융사의 쏟아지는 심사 요청을 현재의 인력으로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벌써 금융권 여기저기서 기형적·파행적 운영을 걱정하는 이유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달 국무회의에서 공직자의 권한과 책임을 얘기하다 부채 '파초선'을 언급했다. 그 위력은 이렇다. "한번 부치면 천둥 번개가 치고, 두 번 부치면 세상이 뒤집어진다." 과하게 쓸 일이 아니다.
김필수 경제금융매니징에디터 pilso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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