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재 보고 받길 거부한 부장검사에서 '검사장'으로
조직 비판 이슈메이커보다 리더 품격·능력 보여줄 때
그가 처음부터 '일잘못(일을 잘 못 하는)' 검사는 아니었다. 2007년 한 특수학교에서 발생한 아동학대·성폭행 사건의 공판검사를 맡으면서 검찰총장 표창장도 받았다. 2009년에는 검사 중에서도 에이스들만 뽑아간다는 법무부 법무심의관실에 발탁됐다. 심지어 여검사 배정 인원이 한 명밖에 없는 자리였다. 표창장까지 받았던 그였지만, '일잘러(일을 잘하는 사람)'들이 모인 법무부에서는 보고서를 너무 못 쓴다며 선배로부터 매일 혼이 났다. 막내 검사였던 그는 수석 검사 선배 옆자리에 앉아 첨삭 지도를 받았다. 당시 그를 가르쳤던 선배는 훗날 검찰총장이 된다.
법무부에서 나온 그는 2012년 서울중앙지검 공판부에 배치된다. 그는 재심 사건에서 백지구형을 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어기고 무죄를 구형해 세간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어긋나기 시작한 게 이때부터였을까. 그는 이 사건으로 정직 4개월의 징계 처분을 받은 뒤부터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조직을 비판하는 글을 게재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정치 성향을 드러내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검사의 본분인 수사와 재판보다는 내부고발자, 이슈메이커로 유명세를 탔다.
윗선의 눈 밖에 난 탓에 지방을 전전하다가 동기들보다 몇 해 늦게 겨우 승진해 부서가 하나밖에 없는 작은 검찰청에서 부장검사를 달게 됐다. 통상 부장검사는 평검사들이 맡은 사건을 지휘하면서 기소·불기소 등을 1차 결재하는 역할을 한다. 후배 검사들은 부장검사가 된 그에게 사건의 결재를 요청했다. 하지만 그는 후배 검사들이 가져오는 보고서를 들여다보지도 않고 "검사는 각각이 독립된 기관이니 결재를 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를 사실상 회피한 셈이다. 후배 검사들은 수사에 대한 조언이나 지휘도 일절 받지 못했다. 결재를 거부하는 그와 직속상관인 지청장은 크게 다툰 이후 공문을 통해서만 업무 논의를 했다.
그는 평검사들처럼 사건을 배당받아 직접 처리를 하기도 했다. 그가 작성한 공소장을 본 판사가 "부장검사가 쓴 공소장이 맞느냐"고 그의 후배에게 되묻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가 기소한 사건의 공판을 맡은 검사에게 판사들은 재판이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게 도와달라고 읍소까지 했다고 한다. 결국 그는 다시 한직으로 물러났고 자신의 정치 성향을 거침없이 드러내며 본연의 업무보다는 가욋일에 더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이재명 정부에서 처음으로 단행한 고위 간부 인사에서 우리나라에서 두세 번째로 규모가 큰 검찰청의 수장이 됐다. 24년간 검찰에서 근무하면서 제대로 된 수사나 수사 지휘를 해 본 적이 없는 그가 수백명에 달하는 구성원들을 책임져야 하는 자리에 오른 것이다. 일잘러 검사들이 무수히 많은 보고서와 결재가 필요한 문서를 그의 책상에 위에 올려놓을 것이다. 조직의 리더가 된 그의 모습은 일잘못이 아닐 수도 있다. 다만 그를 응원했던 사람도, 비판했던 사람도 그가 이슈메이커가 아닌 리더의 품격과 능력을 보여주길 바랄 것이다.
허경준 기자 kjun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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