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현지시간) ECB 중앙은행 포럼 정책 토론 세션
이창용 "수도권 집값 급등, 금융안정 리스크가 증가 주시"
최근 원화 가치 상승, 그간 과도한 절하 정상화 국면
관세, 디플레이션 유발…글로벌 파편화 韓 경제 심각한 영향
저성장 통화·재정 경기부양보다 근본적 구조개혁 필요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주요국 중앙은행 수장들과 만난 자리에서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도입과 관련한 우려를 표했다. 자본 유출과 자본 규제 회피 가능성 등을 고려할 때 도입에 앞서 정부와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과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등도 이 총재와 뜻을 같이하면서, 공공재인 화폐를 보호하기 위해 규제 체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1일(현지시간) 포르투갈 신트라에서 열린 ECB 중앙은행 포럼의 정책 토론 세션에 패널로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ECB 유튜브 생중계 캡처
"화폐는 공공재" 스테이블코인, 반드시 규제 프레임워크 필요…주요국 총재 한목소리
이 총재는 1일(현지시간) 포르투갈 신트라에서 열린 ECB 중앙은행 포럼(신트라 포럼)의 '정책 토론' 세션에 패널로 참석해 "가장 큰 우려는 규제되지 않은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허용되면 결국 달러 스테이블코인으로의 환전 수요가 자극돼 자본 유출과 자본 흐름 관리 규제 약화 등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이라고 짚었다. 그는 "일각에선 블록체인 기술이 불법 거래 식별과 고객 확인(KYC)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를 확신할 수 없다"며 "이 밖에도 준법성, 은행과의 역할 충돌 문제 등도 도입에 앞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 총재는 비은행 기관의 스테이블코인 발행 허용 시 문제점 등에 대해선 도입 전 정부와 함께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미국에서 '지니어스 법안'이 통과되면서, 많은 핀테크(금융+기술) 기업과 스테이블코인 지지자들이 한국 정부에 비은행 기관의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허용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며 "우리는 민간 상업은행과 함께 허가된 네트워크 내에서 토큰화된 예금 실험을 해왔으나, 공공 영역에서 비은행 기관이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도록 허용할 것인가는 한은의 권한을 넘어서는 문제여서 정부 부처와 협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른 패널 참석자들도 이 총재와 의견을 같이했다. 파월 의장은 "연방 및 주 차원의 규제 체계가 반드시 필요하다"며 "현재 미국은 그 체계를 구축하는 데 진전을 이루고 있다"고 말했다. 라가르드 총재는 "우리는 현재 화폐와 지급 수단, 지급 인프라 개념을 혼용하는 혼란에 빠져 있다. 이 경계가 무너지면 우리는 통화정책 집행 능력을 잃게 되고, 국가의 통화 주권이 위협받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화폐는 공공재이고, 중앙은행은 이 공공재를 보호할 책임이 있다"며 "명확한 정책적 입장을 정립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왼쪽부터)앤드루 베일리 영란은행 총재,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 총재,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가 1일(현지시간) 포르투갈 신트라에서 열린 ECB 중앙은행 포럼의 정책 토론 세션에 패널로 참석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ECB 유튜브 생중계 캡처
원본보기 아이콘"수도권 집값 급등, 금융안정 리스크가 증가 주시…최근 원화 절상, 정상화 국면"
한편 오는 10일 예정된 한은 금융통화위원회의 기준금리 결정은 동결에 힘이 실렸다. 이 총재가 최근 수도권 주택 가격 급등으로 금융안정 리스크가 증가하고 있다는 점을 재차 지적하면서다. 그는 "한국은 지난해 10월 이후 기준금리를 1.0%포인트(100bp·1bp=0.01%포인트) 인하했다. 현재 성장률을 고려하면 이 같은 인하 기조는 계속될 것"이라면서도 "추가 금리 인하의 시기와 속도를 결정할 때 금융안정 리스크도 면밀히 관찰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환율 흐름에 대해선 '원화 가치의 정상화 국면'이라고 진단했다. 원화가 지난 두 달 사이 급격하게 절상됐으나 이는 지난해 12월 예상하지 못한 비상계엄 사태와 이후 이어진 정치적 리스크가 우리 경제의 둔화와 겹치며 원화 가치가 펀더멘털 대비 크게 절하된 데 따른 정상화 과정이라는 설명이다. 글로벌 약달러 역시 달러 위상에 대한 패러다임의 변화라기보다, 시장 참여자들이 헤지(위험 회피) 비율을 높이는 포지션 변화 과정이라고 봤다.
관세, 디플레이션 유발…글로벌 파편화 韓 수출 경제 심각한 영향 미칠 것
무역 의존도가 높은 한국에서 관세 영향에 대한 중앙은행의 대응책이 있냐는 질문엔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인플레이션이 아니라 관세에 따른 성장 저해"라고 짚었다. 이 총재는 "현재 한국의 물가상승률은 2% 수준에서 안정돼 있다"며 "관세는 인플레이션보다 오히려 디플레이션(물가 하락)을 유발한다고 보고 있다"고 진단했다. 한국이 보복 관세를 사용할 가능성이 낮다는 점, 무역 비중이 큰 중국의 수출 가격이 연간 약 5%씩 하락해왔다는 점, 경제성장률이 잠재 성장률에 크게 못 미치고 있어 총수요 압력이 매우 낮다는 점에서다.
이 총재는 글로벌 파편화가 수출 중심 경제인 우리나라에 어떤 식으로든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미국 관세의 직접적인 영향뿐 아니라 중국, 멕시코, 캐나다 등을 통한 간접적 영향도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수출 감소와 함께 세계 무역 부진, 미국의 경제 둔화 등도 서로 연결돼 우리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는 설명이다.
다만 한국은 기업들이 일찍부터 공급망 다변화에 대비해 왔고, 반도체와 같이 인공지능(AI) 기술 발전에 따른 수혜를 보는 강한 산업도 보유하고 있어 이 같은 파고를 버텨낼 저력도 있다고 봤다. 이 총재는 저성장 상황에서 통화·재정정책을 통한 경기 부양 요구가 크나, 근본적으로 필요한 건 구조개혁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신트라 포럼은 ECB가 2014년부터 포르투갈 신트라에서 개최하는 연례행사로 주요국 중앙은행 총재 등이 참여해 글로벌 금융과 경제 이슈를 공유하고 토론한다. 정책 토론은 신트라 포럼의 핵심 세션으로 올해는 이 총재와 함께 파월 의장, 라가르드 총재, 앤드루 베일리 영란은행(BOE) 총재,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BOJ) 총재가 토론자로 나섰다. 이날 파월 의장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사퇴 압박 등 이어지는 공격에 대해 "제 일에만 100% 집중한다"고 말해 청중들의 박수를 받기도 했다.
김유리 기자 yr61@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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