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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약자들의 싸움, 임금체불 문제의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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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약자들의 싸움, 임금체불 문제의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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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세기업 사업주 입장에서 5인 미만 사업장으로 위장해 근로기준법 적용을 피하면 인건비가 15~20%까지 줄어듭니다. 지금같은 불경기에 이 유혹을 견디기 어렵죠"


최근 국내 임금체불 문제에서 화두가 된 사업장 쪼개기 관행에 대해 한 노무사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해 폐업한 자영업자만 100만 명이 넘어선 최악의 경기 상황에서 인건비 20%를 줄일 수 있다는 데 누가 이런 꼼수를 안 쓰겠냐는 것이다.

5인 미만 사업장에 연장근로수당 지급 등 근로기준법에 따른 수당 지급 의무를 일부 면제한 것은 영세 사업주를 배려한 관용적 조치였다. 하지만 경기가 어려워지면서 사업장 쪼개기 꼼수가 마치 생존 전략처럼 퍼지고 있다. 실제 5인 미만으로 위장한 것이 의심되는 사업장은 2015년 이후 3.8배나 늘어났다.


이러한 꼼수를 근절하고 악덕 사업주를 처벌하려면 사업주와 피해 근로자간 법적 싸움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사업장 쪼개기 꼼수를 쓴 사업주가 근로기준법 제43조의 임금전액지급 조항을 어겨도, 고용된 노동자가 5인 이상이라는 것을 단속·처벌할 수 있는 관련 법이 없다. 전국 180만 개가 넘는 영세 사업장들을 전수 조사해 사업장 쪼개기 꼼수를 벌였는지 알아보는데 엄청난 예산과 인력이 들어간다.


또한 이들을 모두 찾아내 처벌하더라도 근로자가 체불 임금을 반드시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업주가 아예 폐업하고 처벌을 받겠다고 하면 피해 노동자는 별다른 실익이 없다. 경제적 약자들간의 싸움에서 근로감독관은 주로 두 약자 모두 가장 피해가 적은 방향인 '중재'로 방향을 틀다보니 임금 체불 문제가 더욱 굳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피해 노동자들은 악덕 사업주 처벌을 위해 법적 싸움에 뛰어들 여유도 없다. 영세 사업장의 노동자들은 대다수가 단기 계약직이나 아르바이트생들이다. 그러다보니 체불된 임금의 액수도 대지급금 한도인 1000만원 이상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드물다. 피해 노동자가 길고 힘든 사업주와의 법적 투쟁을 선택하면 생계가 위협받는다. 그보다는 고용노동부에 대지급금을 신청해서 체불임금을 받고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는 게 더 유리하다.


5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감시와 근로자 보호도 어려운 상황에서 영세 사업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매우 많다. 한국에서 5인 미만 사업장에 근무하는 노동자는 전체 경제 활동 인구의 15.65%에 이른다. 대기업 종사자 비율(13.9%)보다 높다. 이에 비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의 대기업 종사자 비율은 평균 32.2% 정도다. 미국(58%), 영국(46%), 일본(40%)과는 차이가 더 벌어진다.


중장기적인 산업 구조조정을 위한 대책 없이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근로감독관 숫자를 앞으로 수천 명 더 늘리고 대지급금 지급을 위한 임금채권보장기금을 수조 원 늘린다고 해도 고질적인 임금체불 문제를 근절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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