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버린 AI(Sovereign AI, 국가 주권 인공지능)'를 추진한다는데, 지금 나오는 이야기는 '엔비디아의 그래픽처리장치(GPU)' 수급뿐입니다."
국내 주요 AI 반도체 기업에 지속적으로 투자해 온 벤처캐피털(VC) 대표가 최근 기자에게 한 말이다. 그는 "AI 주권을 강조하는 것은 환영할 일"이라면서도 "국내 기업이 주도하는 AI 하드웨어의 활용도를 높일 청사진부터 나와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재명 정부는 민관이 협력하는 100조원 규모의 펀드를 조성해 소버린 AI를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소버린 AI란 생성형 AI, 반도체, 전력·데이터 인프라 등 AI 산업 생태계 전반에서 국가의 역량과 주도권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국가 AI 데이터센터 구축, GPU 5만 장 확보, 국산 AI 반도체 및 거대언어모델(LLM) 개발 등이 추진될 전망이다.
문제는 국산 하드웨어의 사용 경험(레퍼런스) 확대다. 그간 오픈AI의 챗GPT는 엔비디아 GPU 기반으로, 구글의 제미나이는 자사 하드웨어를 기반으로 훈련돼 글로벌 시장을 장악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 정책이 GPU 확보에만 집중되면, 한국형 AI의 자립 가능성은 오히려 낮아질 수 있다. 국내 대표적인 AI 하드웨어 기업인 리벨리온, 퓨리오사AI, 딥엑스 등은 신경망처리장치(NPU)를 개발한다. NPU는 AI 추론 작업에 특화된 반도체로, GPU보다 전력 소모가 적고 저렴하다는 게 강점이다.
한 산업이 하드웨어 단계부터 성장하려면 정부 차원의 기술 검증과 사용처 확보가 필요하다. 퓨리오사AI는 국내에서 NPU 기술을 적용할 제대로 된 수요처를 확보하지 못해 미국 메타의 인수 타깃이 되기도 했다. 최종 인수는 무산됐지만, 유사한 상황을 막고 산업 안보를 확립하기 위해선 국내 기업이 안정감 있게 성장할 수 있는 지원책이 필요하다.
이미 민간에선 가능성을 입증하고 있다. SK텔레콤은 리벨리온의 AI 반도체 '아톰'을 자사 서비스에 시범 적용하고 있으며, AI 서비스 기업 업스테이지는 퓨리오사AI의 차세대 NPU '레니게이드'와 LLM '솔라'를 결합한 온프레미스(사내구축형) AI 시스템을 추진 중이다. 박성현 리벨리온 대표는 지난 3월 추가경정예산(추경)안 논의와 관련해 SNS를 통해 "GPU 확보만 이야기가 되는 것이 무척 아쉽다"며 "(AI 무대에서 한국은) 항상 규모가 아쉽고, 리소스가 터무니없이 부족한 상황이지만, 원팀 코리아로 어떻게든 살길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은 1996년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기술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하며 수십 년간 이동통신 시장을 주도할 수 있었다. 당시 유럽과 노키아가 장악하던 표준 기술을 뛰어넘는 선택과 집중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한국형 AI도 국산 기술 기반의 자립 생태계를 설계할 철학과 전략에서 출발해야 진짜 AI 주권을 확보할 수 있다.
김대현 기자 kdh@asiae.co.kr
꼭 봐야할 주요뉴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