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와이브로·공인인증서·바다OS
소버린AI, 고립이 아닌 '자립'이어야
'세계최초·토종' 고집 말고 생태계 조성을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사용해본 적이 있는 '디지털 고령층(?)'을, 딱 다섯 글자로 화나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공인인증서
2020년 공인인증서가 폐지되기까지, '공인인증서를 설치하세요'라는 팝업창이 얼마나 많은 한국인을 절망에 빠뜨렸을지, 감히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인터넷 뱅킹이라도 하려면 별별 프로그램을 다 깔아야 했고, 그마저도 쉽게 설치되지 않았죠. 접속 기기를 바꾸거나, 혹여 외국에서 결제·송금이라도 할라치면 더 가관이었습니다.
공인인증서는 인터넷 환경에서 꼭 필요한 일종의 '전자서명'이고, 전자서명 자체는 결코 한국만의 특성이 아니라 국제적이고 보편적인 기술입니다. 다만 공인인증서는 타 국가와는 대비되는 특성도 분명했습니다. 국가 주도형 도입(1999년 전자서명법), 사실상의 강제 사용, 민간기술 진입이 어려운 독점적 성격 등이 'K-전자서명'을 만든 셈입니다.
소버린AI, 제2의 공인인증서가 안 되려면

공인인증서는 열악한 인터넷 환경에서 인터넷뱅킹과 전자상거래, 전자정부를 안전하게 구현하기 위해 도입됐다. 공인인증서는 수년간 전자정부 구축과 국내 인터넷뱅킹 활성화에 역할을 해왔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한때 세계 각국에서 한국 공인인증제도와 기술을 배우러 몰려들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액티브 엑스(X) 또는 키보드 보안 프로그램을 필수로 설치해야 해, 서비스 이용자아게 큰 불편을 안겼다. 사진은 9일 한 은행 온라인 사이트의 공인인증서. 연합뉴스
소버린AI(AI)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소버린(Sovereign)은 '자주적', '주권이 있는'으로 번역됩니다. 챗(Chat)GPT 같은 '외국산 AI'에 의존하지 말고 '자국산 AI'를 만들자는 겁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기간 'AI 3대 강국'을 강조했고, 공약에도 담았습니다. 지난 20일에는 IT·AI 산업현장을 찾아 소버린AI에 대한 깊은 관심을 드러냈죠. 한 참석자가 소버린AI의 필요성을 강조하자, 이 대통령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건 '베트남에서 쌀이 많이 생산되는데, 뭐 하러 한국이 쌀 농사를 짓느냐'고 하는 것과 같다."
소버린AI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비유이자 메시지였죠. JP모건은 "새정부 소버린AI 전략의 큰 수혜를 받을 것"이라며 네이버의 목표주가를 기존 25만원에서 27만원으로 상향 조정했습니다. 지난 6월 2일 기준 시총 12위였던 네이버는 23일 시총 5위까지 껑충 뛰어올랐습니다. 27일 기준으로는 다시 10위로 내려왔으나, 시장의 기대감은 여전합니다.
물론 소버린AI는 네이버만의 영역이 아닙니다. 소버린AI는 반도체, 데이터, 네트워크, 전력 등 수많은 산업의 연계로 달성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더 중요합니다. 결코 실패해서는 안 되는 것이죠. 그럴수록 질문이 필요합니다. '우리만의 AI', '자주적 AI'가 정말 괜찮을까?'
디지털 혁명이 발생한 이래로, 한국은 디지털 주권 확보를 위해 의외로 많은 시도를 해왔습니다. 개중에는 성공도 실패도 있었죠. 그 경험을 뒤돌아보는 건 소버린AI의 성공을 위해 필요한 일일 겁니다. '제2의 공인인증서'는 절대 안 될 일입니다.
한국이 지켜낸 디지털 영토들 : 검색, 메신저, 지도, HWP …
한국이 디지털 주권을 지켜낸 사례는 적지 않습니다. 카카오톡이 대표적입니다. 2010년 3월 출시된 카카오톡은 현재 한국인 대부분이 사용합니다. 카카오톡이 없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우리는 왓츠앱(WhatsApp), 페이스북 메신저, 위챗(WeChat) 등을 주로 쓰고 있을 겁니다.
검색 시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세계 검색시장을 지배하는 구글이 한국에서는 네이버를 뒤쫓고 있습니다. 한국인의 검색 기록과 관심사는 한국 기업이 관리하는 것이죠. 이는 개인정보보호, 데이터 주권 측면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지난해 '라인야후 사태'가 바로 이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죠. 네이버가 개발한 라인(LINE)은 일본인 9600만명이 쓰는 메신저입니다. 일본은 이 상황을 '데이터 주권 상실'로 간주한 것이죠.
문서 프로그램 한컴오피스(HWP)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MS) 워드(Word)가 전 세계를 장악했지만, 한국만큼은 HWP가 버티고 있죠. 맞춤법 검사나 복잡한 문서 편집 기능은 워드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하드웨어 분야에서는 삼성전자의 갤럭시가 있습니다. 전세계 스마트폰 시장에서 애플과 양강 구도를 형성하고 있죠. 전세계 D램 반도체 시장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점유율은 70%를 넘습니다. 특히 AI 시대 핵심부품인 HBM(고대역폭 메모리)에서는 SK하이닉스가 독보적 경쟁력을 갖추고 있죠.
디지털 주권의 명과 암 : 경쟁을 통한 소비자 이익 또는 갈라파고스화

갈라파고스(Galapagos)는 남아메리카로부터 1000km 떨어진 적도 주위의 태평양 16개 화산섬과 주변 암초로 이뤄진 섬이다. 기술이나 서비스 등이 국제 표준에서 벗어나 고립화되는 현상을 말한다. AP연합뉴스
원본보기 아이콘시장에서 독점은 소비자에게 해롭습니다. 경쟁이 소비자의 이익을 지켜주죠.
국산과 외산이 경쟁하면서 서비스 품질이 올라가고 가격도 내려갔습니다. 시장조사업체 누케니(Nukeni)에 따르면, 전세계 36개국 중 한국은 아이폰16이 10번째로 저렴한 나라입니다. 한국에서 '애플이 아이폰 배짱 장사한다'는 비판 여론이 적지 않지만, 그마저도 갤럭시가 버티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겁니다. 36위, 가장 비싼 나라는 튀르키예였고, 35위는 브라질이었습니다. 소비자에게 대안이 없는 시장에서는 소비자가 아니라 공급자가 왕인 법입니다.
라인야후 사태에서 보듯, 데이터 주권 확보도 가치를 매기기 어려운 이익입니다. 검색, 이메일, 결제, 메신저 등을 자국 기업이 운영하면서 자국민 데이터가 국외로 무분별하게 유출되는 상황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이는 개인정보보호는 물론 국가 안보 차원에서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산업 고도화와 일자리 창출 효과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국산 서비스와 제품 덕분에 국내에서 발생한 소비가 국내 기업의 수익으로 연결되고 재투자됩니다.
이러한 성과와 성공 신화들은 활발한 스타트업 생태계 문화로 이어집니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CB인사이트에 따르면, 2024년 기준 한국의 유니콘 기업은 14개입니다. 매년 늘어나는 추세죠. 국내 IT 기업들이 글로벌 기업과 경쟁하고 선전하는 모습은 후세대에 롤모델이 되고 있을 겁니다.
반면 일본은 10개에 못 미치고 있습니다. 경제 규모의 차이를 고려하면 그 대비가 극명합니다. 일본의 기업 문화는 불확실성을 회피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규범과 안정성이 중요하죠. 일본 경제신문 닛케이는 '투자 부재, 유니콘 불모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일본이 경제 규모에 비해 유니콘 기업이 적은 원인 중 하나로 '창업에 소극적인 대중의 인식'을 꼽기도 했습니다.
디지털 독립의 당위성과 이익만 주장하는 건 공정치 못한 일일 겁니다. 공인인증서처럼, 좋은 의도와 무관하게 불편과 손해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한국에서는 HWP가 표준이지만, 해외에서는 MS의 워드가 표준입니다. 글로벌 기업과 협업하거나, 해외에서 교육할 때 불편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일부 독과점에 가까운 시장 상황은 한편으로 경쟁의 약화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자칫하다간 글로벌 표준과 동떨어져 가면서 'IT 갈라파고스'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한국만의 독특한 시스템들이 당장에는 이익이 되지만, 장기적으론 해외 진출이나 국제 협력에 걸림돌이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할 수 있죠.
와이브로(WiBro)의 교훈 : '세계 최초', '토종 기술'의 함정
한국의 디지털 주권 확보 시도가 모두 성공한 것도 아닙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와이브로(WiBro)입니다. 2006년 세계 최초로 상용화한 무선 인터넷 서비스이자, 한국 정보통신 전략의 첨병이었죠. 기술적으로 뛰어났고 국제 표준으로 채택되는 영광의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LTE라는 더 좋은 기술이 나오면서 2018년 서비스를 종료하게 됩니다. 초기 경쟁 상황에서 협력사와 협력 국가를 끌어들이지 못했습니다. 국제 표준으로 채택되긴 했으나, 결국 생태계 조성에 실패한 겁니다.
이는 삼성전자의 독자적 스마트폰 운영체제(OS) 바다(Bada), 스마트워치 OS 타이젠(Tizen)과도 유사합니다. 자체 플랫폼 구축 의지는 강했으나, 안드로이드·iOS의 압도적 생태계와 맞서기는 역부족이었죠. 바다 OS가 출시됐을 때, iOS에는 앱이 20만 개, 안드로이드에는 7만 개가 있었습니다. 바다 OS는 1000개도 안 됐죠. 개발자들이 바다 OS용 앱을 만들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런 사례들이 주는 교훈은 명확합니다. 기술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죠. '세계 최초', '순수 토종기술' 등의 수식어는 보기엔 좋지만, 성공과는 무관합니다. 와이브로, 바다, 타이젠이 실패한 이유는 결국 참여자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서비스를 만들어도 협력사·개발자 등 우군을 확보하지 않으면 생태계를 조성할 수 없습니다.
소버린AI의 길 : 고립이 아닌 자립
소버린AI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독립', '주권', '자주' 등과 같은 개념에 매몰되어선 안 됩니다. 최대한 많은 협력사, 단체, 국가를 끌어들이고, 참여자 모두가 공생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개발자들이 쉽게 활용할 수 있는 도구와 환경을 만들고, 개발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스타트업들이 AI를 활용한 서비스를 만들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한 기업 또는 특정 기업이 생태계의 과실을 독점해서도 안 됩니다. 국내 여러 기업이 선의의 경쟁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지 않으면 혁신은 멈춥니다. 정부가 특정 기업만 지원하지 않고 내부 경쟁을 촉진하는 역할도 병행해야 합니다.
글로벌 호환성도 중요합니다. HWP처럼 한국에서만 쓰이는 AI가 되면 안 됩니다. 글로벌 AI 서비스들과 자연스럽게 연동될 수 있어야 합니다.
큰돈을 들여 개발한 소버린AI라고 해서, 사용을 강제·의무화해서도 안 됩니다. 공인인증서가 폐지 되기 전, 전자거래법상 물품 30만 원 이상 구매 시 공인인증서를 의무적으로 이용해야 했습니다. 의무화, 강제 조항은 경쟁을 위축시키고 고립된 생태계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국산AI든 외산AI든 소비자가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행히, 한국의 소버린AI는 생태계 조성에 적잖이 신경을 쓰는 모습입니다. 네이버는 "소버린 AI를 통해 다양한 국가와 기업이 참여하는 건전한 AI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다"면서 "다양한 주체 간 경쟁과 공존은 기술 혁신을 가속화하고, 더 안전하고 효율적인 알고리즘 개발로 이어져 AI의 장기적이고 균형 잡힌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아울러 소버린AI가 '한국만의 AI'가 되지 않도록 한다는 과제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네이버는 " AI의 발전으로 인한 혜택이 특정 문화권이나 국가에 편중되지 않고, 다양한 국가와 기업이 참여하는 건전한 AI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기술의 편리함을 모두가 공평하게 누리면서, 문화적 가치와 다양성을 보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가는 것이 AI 시대를 맞이하는 네이버의 새로운 도전과 과제"라고 했습니다.
소버린AI의 필요성을 두고 다투는 건 시간 낭비에 가깝습니다. '왜'가 아니라 '어떻게'를 두고 고민해야 합니다. '무조건 우리 것'이라는 생각은 위험합니다. 그간 'K-ICT'의 경험이 보여주듯, '토종기술', '세계 최초'에 몰입하다 글로벌 시장에서 외면받는 길로 빠져선 안 됩니다. 소버린AI는 고립이 아닌, 자립이어야 합니다.
김동표 기자 letmei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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