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근 포스텍 총장 인터뷰
내년 개교 40주년 맞는 포스텍
독립적 사고·개척자형 인재 육성 목표
신입생 전원 1000만원 바우처 제공
강의실 밖 체험형 경로 탐색 기회
'AI 장착한 창의적 인간' 교육에 초점
전공 무관 AI 기초 교육·행정 AI 전환
"양자택일 아닌 양립추구 교육 목표"
누구나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다. 하지만 세상은 익숙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찾는 사람들이 바꾼다. 김성근 포항공대(포스텍) 총장은 다른 길을 찾는 '개척자(Pathfinder)'를 포스텍 정신으로 내세워 창의적 사고와 융합연구를 통해 인공지능(AI), 양자, 바이오 등 미래 과학 분야에서 앞서 나가자는 목표를 제시한다.
포스텍은 내년 개교 40주년을 맞는다. 김 총장은 세계적인 대학으로 계속 성장할 수 있을지에 대한 위기감을 느꼈고 지난해 '제2의 건학'을 선언하며 새로운 출발을 다짐했다. 김 총장은 "대학을 아예 다시 세운다는 각오로 교육·연구·산학협력 전반의 체질을 바꾸겠다"며 "똑똑한 것보다 남과 다르게 볼 줄 아는 능력을 갖춘 창의적 인재가 AI 시대에 더 중요하다"고 했다. 아시아 경제가 그의 비전을 들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제2건학'은 어떤 문제의식에서 나왔나.
▲단순히 몇 가지를 개선하거나 고치는 수준으로는 부족했다. 설립 당시의 이상을 얼마나 실현하고 있는지, 앞으로도 세계적인 대학으로 성장할 수 있을지를 냉정히 돌아봤으나 낙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단순히 개선이나 보완 수준이 아니라, 아예 학교를 새로 세운다는 각오로 출발한 게 '제2의 건학'이다.
-AI 시대에 필요한 인재상을 말해 달라.
▲지금은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다르게 보는 사람'이 더 중요한 시대다. 과거의 인재상은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부터 출발했다. 지식의 습득 속도와 숙련도를 유능함의 기준으로 삼았다. 하지만 AI가 이를 무의미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니 핵심은 내가 나머지 80억 명과 '어떻게 유의미하게 달라야 하는가'이다. 결국 남들과 같은 방향이 아니라, 다른 방향을 보며 질문을 던지는 사람, 독립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포스텍은 그런 개척자형 인재를 키워내는 대학이 되고자 한다.
-그런 인재 양성을 위한 포스텍의 노력을 듣고 싶다.
▲학생들에게 스스로 질문하고, 부딪혀 보며 자기 길을 찾아가는 경험을 주기 위해 '체험형 경로탐색'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모든 학부 신입생에게 총 1000만원 규모의 바우처를 제공하고, 재학 기간에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학생들은 이를 활용해 노벨상 시상식에 참석하거나 세계적인 기술 전시회와 학회에 참가하고, 해외 교환이나 창업에도 도전하고 있다. 강의실 안이 아닌, 세상 속에서 배우고 실험하게 하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핵심이다.
-포스텍이 추진 중인 AI 연구와 교육 방향은 무엇인가.
▲AI는 단순한 기술을 넘어 인간 능력을 증강시키는 도구가 돼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기술 중심이 아니라 'AI를 장착한 창의적인 인간'을 기르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미 전공과 무관하게 신입생에게 AI 기초 교육을 필수화했고, 인공지능대학원과 연구원을 통해 글로벌 기업 및 대학들과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현재는 교육과 연구, 행정 전체를 AI 기반으로 전환하는 'AI 캠퍼스'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다.
-포스텍은 양자기술 분야에서 국내 최고 역량을 갖추고 있다. 구체적 전략은.
▲양자기술 분야는 단순한 유망 기술을 넘어 국가간 기술 주권 경쟁의 핵심 전장이 되고 있다. 포스텍은 이 분야에서 단순히 장비를 도입하거나 유행을 좇는 수준을 넘어서 세계 최고 수준의 세부 기술 확보를 목표로 삼고 있다. 예를 들면 큐빗(양자컴퓨팅 기본 단위) 소자로 어떤 물질이나 상태를 선택할 것인지, 큐빗의 개수와 안정성이라는 두 과제를 어떻게 동시에 해결할 것인지, 오류가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양자컴퓨팅 환경에서 어떻게 에러를 교정하고 효율적인 알고리즘을 구현할 것인지와 같은 문제가 진짜 실력의 차이를 가르는 지점이다. 양자 분야는 구체적인 전략과 집요한 기술적 깊이가 없으면 앞서 갈 수 없다.
-과학 인재 양성을 둘러싼 사회 환경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의대 쏠림은 물론, 지역 소멸도 현실의 벽이다.
▲의대 열풍은 그냥 진로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 전체가 불확실성을 피하고, 예측 가능한 성공에만 집착하는 구조가 만든 결과다. 하지만 과학은 본질적으로 불확실성과 실패를 감수해야 하는 영역이다. 지금은 잘 닦인 길을 걷는 사람이 아니라 없는 길을 만드는 사람, 즉 과학자가 가장 필요한 시대다. 포스텍 역시 지역 소멸 영향권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입학생의 70% 이상이 수도권 출신이라는 점은 흥미롭다. 이는 점수 중심이 아니라 가능성 있는 원석을 찾아내려는 선발 철학 덕분이라고 본다. 올해부터는 일부 입시트랙에서 면접 비중을 33%에서 50%로 확대했고, 사고력, 창의성, 문제 해결력, 인성, 공동체 역량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많은 대학들이 면접 비중을 줄여가는 상황에서 포스텍은 소수 정예 대학이기에 가능한 '사치스러운 선발'을 지켜가고 있다.
-우수 인재 확보와 육성 차원에서 교수 확보 정책도 강화되고 있다고 들었다.
▲신임 교원에게 지원하는 정착연구 지원금을 최대 10억원으로 4배 확대했으며, 정년연장 조기 결정 제도를 최초로 도입했다. 만 50세가 되는 시점부터 70세까지의 정년연장을 미리 확정해 외국에서와 같이 긴 호흡으로 장기적인 연구가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연공서열도 타파했다. 신임 조교수부터 퇴임을 앞둔 원로교수까지 매년 업적만으로 평가해 파격적인 성과급을 주고 있다. 지금까지 교수진이 수도권으로 유출되기만 하다가 최근 들어 국내 최고 명문대에서 포항으로 오는 분들이 생기고 있다.
-해외 석학 유치를 위한 전략이나 성과가 있다면.
▲포스텍은 해외 석학 유치를 위해 글로벌 석좌교수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부임 의사를 밝힌 세계적인 학자들과 현재 협의 중이며, 활동 기반이 되는 국가를 옮기는 사안인 만큼 시간이 필요하지만, 조만간 한두 건 성사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한 지난해부터 시작한 '포스텍 경험하기(Experience POSTECH)' 프로그램도 주목받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해외 석학들이 최대 1개월간 단순 방문이 아닌 체류형 협업을 통해 포스텍의 교육과 연구를 직접 경험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지난해 7월부터 시행된 이래 5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이미 9명의 해외 연구자가 다녀갔으며, 반응도 매우 긍정적이다. 최근에는 세계적인 연구자들이 자발적으로 포스텍과의 협력을 제안해 오는 사례도 늘고 있어 향후 더욱 강력한 국제 연구 네트워크 형성이 기대된다.
-산학연 협력 모델을 확장하거나 새로운 분야로 확대할 계획이 있나.
▲이제는 산학연 협력 체제를 국제적 수준으로 끌어올릴 시점이라고 판단한다. 정부가 추진 중인 '글로컬대학'이나 '지역혁신중심 대학지원체계(RISE)' 같은 사업에 적극 참여해 포항을 국가 혁신의 실험장으로 만들고자 한다. 새로운 기술, 새로운 교육 모델, 새로운 산학협력 방식을 먼저 실험하고 성공 사례를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포항발 혁신 모델을 구축하는 것이 목표다.
-포스텍의 사회 공헌 활동에 대해 말씀해 달라.
▲대표적인 사례는 애플 디벨로퍼 아카데미다. 한국 유일의 애플리케이션(앱) 개발자 양성 기관이며, 포항에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곳에서는 시각·청각 장애인을 위한 앱이 다수 개발되고 있고, 포스텍 학생들도 참여하고 있다. 또 미래지성아카데미를 통해 지역 시민을 대상으로 고급 강연을 진행하며 과학과 인문, 예술을 잇는 열린 지식의 장을 만들어 왔다. 포항시민이 양자물리학자와 대화하고 고등학생이 철학자와 토론하는 풍경이 이곳에선 일상처럼 펼쳐진다. 과학기술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고, 지적 공감과 문화적 상상력이 함께 가야 한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활동이다.
-남은 임기 동안 어떤 총장이 되고 싶은가. 꼭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중요한 건 총장 개인의 모습이 아니라 구성원이 변화를 체감하고 동참하게 만드는 대학이다. 대학은 학원이 아니라, 교육과 연구를 통해 미래 인재를 만들어내는 곳이어야 한다. 지난해 졸업식에서 '한계를 모르는 호박벌처럼 비상하라'는 말을 했다. 공기역학적으로 날 수 없지만, 그걸 몰라서 날 수 있었던 호박벌처럼 학생들도 불가능을 배우기 전에 자신의 가능성을 먼저 시도해 보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다. 앨런 가버 하버드대 총장이 말했듯이 'Either-Or(양자택일)'이 아니라 'Both-And(양립 추구')의 삶을 권하고 싶다. 하나를 선택하며 다른 가능성을 닫는 게 아니라 여러 가능성을 끝까지 열어두는 교육을 실현하고자 한다.
김성근 포스텍 총장은
김 총장은 1989년부터 2022년까지 서울대 화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 서울대 자연과학대 학장, 기초과학연구원 원장, 카오스재단 과학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2008년 이명박 정부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에서 활동하며 과학기술 정책 수립에 기여했다. 영국왕립화학회(RSC) 펠로, 국제화학저널(PCCP) 편집위원장 등을 맡는 등 해외에서도 학문적 영향력을 발휘해 왔다.
김 총장은 기술 중심의 교육을 넘어 스스로 질문하고 새로운 길을 찾는 인재를 길러내는 것을 교육의 목표로 삼는다. 'AI를 장착한 창의적 인간'을 키우겠다는 것이다. 1년 6개월 전 포스텍 총장으로 취임한 이후 교육과 연구, 행정 전반을 AI 기반으로 전환하는 'AI 캠퍼스'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아울러 포항을 국가 혁신의 실험장으로 만들겠다는 구상도 갖고 있다. 그는 "교육과 연구를 통해 학생들이 스스로 가능성을 실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총장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변선진 기자 sj@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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