돛과 밧줄로 이뤄진 범선은 바람의 힘으로 나아간다. 출항하려면 밧줄을 팽팽히 당겨 돛을 올려야 하지만 항해하다 보면 밧줄을 느슨하게 풀어 바람을 받아들여야 할 때도 있다. 행정도 마찬가지다. 민생의 바람을 타고 순항하려면 굳게 묶인 밧줄을 풀어야 하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
지난해 말 서초구 재건축 지역을 꽁꽁 묶고 있던 밧줄 하나가 풀렸다. 개정된 '토양환경보전법 시행규칙'이 시행된 것이다. '불소 토양오염 우려 기준치'가 완화돼 지역주민과 사업장 부담을 한층 덜게 되었다. 불소는 치약 원료 등 일상생활과 산업현장에서 유용하게 쓰이지만 인체에 과다 노출 시 부작용을 일으키는 법정 관리대상 물질이다. 기준을 초과하는 불소가 토양에서 발견되면 정화 책임자인 사업자 등은 토양을 정화할 의무가 있다.
이는 환경과 개발의 균형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규제다. 다만 개정 전 기준은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10배 가까이 엄격했다. 또 국내 토양 대부분이 자연 불소 함량이 높은 화강암 지대라는 지질학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아 불합리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불소 규제는 방배동 등 재건축 지역에 걸림돌이 돼 왔다. 재건축 과정에서 불소 오염이 확인되면 토양 정밀조사와 정화 작업에 최대 몇 년이나 걸리는 시간과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방배5구역은 약 750억원, 방배6구역은 약 400억원의 토양 정화비용 부담으로 착공이 지연되며 어려움을 겪었다.
서초구는 지난 2년간 주민 의견에 따라 불소 규제 완화를 위한 목소리를 내왔다. 환경부와 국무조정실 방문, 장관 건의, 공문 등으로 재건축 현장의 어려움을 알리고 합리적인 규제 완화를 촉구했다. 입법예고 기간에도 방배13·15구역 등 재건축사업장, 서울법원 제2청사를 준비 중인 법원행정처와 함께 환경부에 추가 의견을 제출했다. 노력 끝에 다행스럽게도 불소 기준이 합리화되는 법령 개정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특히 주거지의 경우 기준이 2배 완화돼 숨통이 트였다고 할 수 있다. 방배13구역은 정비구역 내 불소 정화비용이 약 10분의 1로 줄었고, 방배신동아, 반포1·2·4주구 등 5개소는 정화명령이 면제되었다.
이번엔 양재동으로 눈을 돌려보자. 이곳에선 규제 해제로 인한 기대감이 솟고 있다. 지난해 11월 중소벤처기업부가 양재·우면동 일대를 '인공지능(AI) 특구'로 지정하면서 특허법, 출입국관리법 등 6개 규제 특례가 적용되고 있다. 특허출원 우선심사로 기술이전 속도가 높아지고, 외국인 사증 발급절차 완화와 체류기간 연장으로 해외 우수인력을 끌어당기며 '글로벌 AI 중심도시'로 위용을 갖춰가고 있다. 또 지방재정투자사업 타당성 심사면제로 1100억원 규모 'AI스타트업 육성펀드' 조성에도 탄력이 붙었다.
AI 혁신 시대 새로운 성장동력이 꿈틀대는 지금, 열린 규제가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예외적으로만 규제하는 '네거티브 규제'가 필요한 타이밍이다. 불합리한 규제는 걷어내고, 성장과 도약의 가능성은 넓혀야 한다.
지방정부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주민 일상 가장 가까이에서 민생의 흐름을 읽는 유연함을 갖춰 '일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주민과 기업, 노동자와 사업가 모두 바다를 항해하는 여정에서 지방정부는 암초가 아닌 등대로 빛나야 한다. 그 빛은 우리 도시의 운명을 바꿀 것이다.
전성수 서초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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