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공적 표준·사실 표준 양쪽에서 '표준화' 주도
양자정보기술(Quantum Information Technology)의 상용화가 본격화되면서, 이를 둘러싼 글로벌 표준 경쟁도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양자정보기술은 양자통신·양자센서·양자컴퓨팅 등 핵심 분야에서 차세대 기반으로 주목받는다. 특히 정밀 하드웨어와 기업 간 시스템 연계가 필수적인 특성상 표준화는 생존 조건이나 다름없다.
산업 생태계가 원활히 작동하려면 기술 개발, 생산, 유통, 서비스 등 각 단계에서 공통의 규칙과 호환성이 전제돼야 한다.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바로 '표준(Standardization)'이다. 표준은 기술의 신뢰성과 확장성을 보장하고, 다양한 기업 간 협업과 시장 진입을 가능하게 만드는 기반이 된다.
초기 시장 열린 양자컴퓨터, 표준화 진행 급물살
양자통신은 양자 키 분배(Quantum Key Distribution·QKD) 방식이 2008년부터 표준화가 진행돼 현재 가장 활발히 표준화가 진행 중이다. 양자컴퓨터는 IBM, IQM, RIKEN 등에서 100큐비트급을 만들고, 클라우드 서비스뿐만 아니라 기기 자체 판매도 가능한 초기 시장이 열리면서 표준화가 진행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양자센서에 경우도 상용화 가능한 양자중력계 등에서부터 표준화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양자정보기술 표준화는 제정하는 주체에 따라 국가와 권역, 국제단위로 전개되는 '공적 표준(De jure standard)'과 시장의 독점적 지위에 의해 정해지는 '사실 표준(De facto standard)'으로 구분된다.
공적 표준은 국제표준화기구(ISO), 국제전기기술위원회(IEC), 국제전기통신연합(ITU), 유럽전기통신표준협회(ETSI)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이들 기구에서 공식 절차와 합의를 통해 제정·승인되는 '법적인 표준'으로 강제성을 띠게 된다.
이와 달리 사실 표준은 공식적인 표준화 기구의 승인 없이 특정 기업 등이 특정 기술이나 인터페이스 등을 공개함으로써 후발 기업과 부품공급자가 표준으로 여기면서 따르게 되는 경우를 말한다. 주로 연합단체의 표준규격이 되므로 단체표준이라고도 한다.
양자기술의 용어·기술·아키텍처·인터페이스 등 표준 논의
국가 단위 표준화는 자국 내 기술 주도권 확보와 안보 전략을 기반으로 추진되는 경우가 많다. 미국은 이런 국가 중심 접근의 대표적 사례다. 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는 양자 내성 암호(PQC) 분야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양자 컴퓨터에 의해 기존 암호 체계가 무력화되는 상황을 대비해 PQC 알고리즘 공모 및 평가를 진행, 지난 1월 최종 표준안을 채택하기도 했다.
한국이 의장국으로 활동하고 있는 ISO와 IEC가 공동 설립한 '양자기술 공동기술위원회(IEC/ISO JTC3)'는 양자정보기술의 기반이 되는 용어 정의, 기술 분류, 각 분야의 아키텍처와 인터페이스 표준안 논의를 진행한다. 모두 양자기술 생태계의 상호운용성 확보에 필수적인 요소들이다.
권역 단위 표준화는 경제 공동체 내의 기술 협력을 기반으로 진행되며, 범유럽 차원의 조율과 산업 연계를 강조한 유럽전기통신표준협회(ETSI)의 '산업표준그룹(ISG) QKD'가 대표적이다. 양자 키 분배(QKD) 시스템의 실질적인 구현과 상호운용성 확보를 위한 기술 표준을 개발하고 있으며, 국내 기업인 SKT도 이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국제단위의 표준화는 국가 간 합의를 바탕으로 글로벌 기술의 통일성과 호환성을 확보하는 데 중점을 둔다.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의 전기통신표준화부문(ITU-T)은 QKD 시스템의 상호운용성, 보안 요구사항, 네트워크 구조 등을 다루는 표준 개발을 진행 중이며, 향후 양자 인터넷 구축을 위한 라우팅, 자원 할당 등 선행 기술 표준화도 함께 추진하고 있다.
韓, 국제 표준화 기구서 주도적 역할
이런 각국 정부와 국제기구 중심의 표준화 노력과 달리, 산업계에서는 보다 빠르고 실용적인 접근을 통해 '사실 표준'을 형성해 나가고 있다. 공적 표준이 정해지기까지는 긴 시간과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지만, 산업계는 시장 요구에 즉각 대응하면서 기술을 선도하고 있다.
미국의 QED-C, 유럽의 QUIC, 캐나다의 QIC, 일본의 Q-Star 등의 산업 컨소시엄을 구성하고, 자국 내 산업 생태계를 중심으로 기술 개발과 사실 표준화를 병행하며, 경쟁력 확보에 나서고 있다.
한국은 국제 공적 표준과 산업계 주도의 사실 표준 양쪽 모두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박성수 연세대 융합과학기술원 교수는 "2024년 5월 서울에서 열린 창립총회에서 한국은 양자센서와 양자통신 2개 분야를, 양자컴퓨터는 호주와 프랑스가 공동으로, 양자난수는 중국, 양자가능기술은 덴마크가 표준화를 주도하게 됐다"면서 "한국이 어느 정도 주도권을 갖고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밝혔다.
사실 표준 부문에서도 한국이 주도한 산업 주도형 표준화 기구인 '양자산업 표준협회(Quantum Industrial Standard Association·QuINSA)'는 IBM, IQM, SKT, KT, LG전자 등 국내외 180여 개 기업이 참여하고 있으며, 양자 통신·센서·컴퓨팅 전반에 걸친 상용화를 목표로 표준을 개발 중이다.
QuINSA는 JTC3 표준이 개발에 3~4년이 소요되는 등 기간적 한계가 있는 점을 인식하고, 이보다 훨씬 빠른 6개월에서 1년 내외의 개발 주기를 통해 실용적인 기술 표준을 제시하며, 기업 중심의 기술 적용 가능성에 집중하고 있다.
"韓, 표준화 회의서 안건 제안·토의할 수 있는 '표준전문가' 양성 시급"
전문가들은 한국이 국제 표준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으나, 여전히 R&D와 표준화, 산업화 간의 유기적 연계가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양자 소자, 큐비트 제어, 알고리즘 등 원천 기술에 대한 투자와 함께 AI·클라우드·6G 등 기존 ICT 기술과의 융합, 양자정보기술 전문 인력 양성, 민간 수요 창출을 위한 시범사업 확대 등이 병행돼야 한다.
또 JTC3, NIST PQC, ITU-T, ETSI 등 주요 국제 표준화 기구에 전문가 파견을 확대해 한국 기술이 국제 표준에 반영되도록 적극적으로 제안할 필요가 있다.
특히 표준전문가의 양성이 시급하다. 박 교수는 "표준화할 기술을 가진 기술전문가와 표준화 회의에서 안건을 제안·토의할 수 있는 표준전문가 등 두 분야의 전문가가 꼭 필요하다"면서 "한국에는 기술전문가들은 많지만, 표준화에 대한 관심을 가진 기술전문가가 많지 않다. 표준개발 과제의 정부 지원을 대폭 늘려서 표준화에 관여하는 전문가를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종화 기자 justi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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