⑬국물도 고체로 바꾸는 진공 건조
인스턴트, 냉동식품에 필수
혈청, 반도체도 만드는 핵심 기술
라면 분말 스프는 단 한 줌만으로도 깊은 국물 맛을 낼 수 있는 가루다. 일반 라면뿐만 아니라 업소용 대용량 제품으로도 판매되며, 요리 초보자도 비교적 손쉽게 음식 맛을 낼 수 있어 '마법의 가루'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어디서든 구할 수 있는 흔한 재료이지만, 사실 스프를 만드는 데 들어간 기술은 현대 문명의 핵심으로 자리하고 있다.
진공 상태에서 수분 날려 보내면…국물도 알갱이가 된다
라면 스프는 '진공 건조' 공정을 거쳐 완성된다. 진공 건조란 식자재를 진공 체임버 안에 밀폐한 뒤, 고온이나 저온으로 수분을 빠르게 제거해 건조하는 공정이다.
라면 가루의 원물이라 할 수 있는 국물 원액 자체는 일반적인 가정집 요리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맛의 베이스를 정할 쇠고기, 닭고기 등 육류를 먼저 정해 충분히 국물을 낸 뒤, 각종 채소와 양념을 첨가해 완성한다. 이후 국물을 진공 체임버 안에 넣어 건조하면, 물이 완전히 제거된 고체 형태가 된다.
보통의 방식으로 식품을 건조하면 원형이 살짝 변질될 수 있다. 식품 안에 함유된 수분의 분자 구조가 변형되며 식품 자체의 성질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공 상태에서 급속 건조하면 수분은 빠르게 증발해 버린다. 이로인해 식품의 분자 구조가 고스란히 유지돼 맛, 식감의 변화도 거의 없다.
따라서 진공 건조로 고체화한 라면 스프는 '국물에서 수분만 날려 보낸 상태'가 된다. 이런 형태의 스프는 뜨거운 물만 만나면 잃어버린 수분을 다시 채워 원래의 국물로 복원될 수 있다. 이같은 진공 건조는 오늘날 라면뿐만 아니라 간편식, 과일·야채칩 등 수많은 가공식품에 적용된다.
혈청부터 반도체까지…현대 문명의 핵심 된 진공 건조
진공 건조는 식품 업계에서만 유용한 기술이 아니다. 처음 진공 건조가 대량으로 접목된 분야는 의료 산업이다. 1933년 12월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의과대학에서 세계 최초로 사람의 혈액을 진공 건조한 '건조 혈청'을 만들었다. 혈액은 부패하기 쉬워 오래 보존할 수 없지만, 혈청 보존 기술이 개발된 뒤로는 더 많은 환자가 안전하게 수혈받을 수 있게 됐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건조 혈청은 연합군 수송선에 실려 유럽, 태평양의 병사들을 구하는 데 요긴히 쓰였다.
진공 건조는 반도체 생산 공정의 핵심 기술이기도 하다. 간편식과 냉동식품 산업이 태동하던 1919년, 영국에 설립된 기업 '에드워드'는 진공 건조 설비의 핵심 부품인 '진공 펌프'를 개발했다. 진공 펌프는 밀폐된 공간 안에 있는 물질을 밖으로 배출시켜 진공 상태를 만드는 기계 장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냉동식품, 간편식 생산라인에 진공 펌프를 납품하며 성장한 에드워드는 이제 반도체 생산용 진공 펌프를 전문적으로 만든다. 이 진공 펌프는 반도체 생산 공정 중 '증착(반도체 기판 위에 얇은 막을 형성하는 것)'의 필수 설비다. 분자 두께 단위의 박막을 형성해야 하는 초미세 공정인 증착은 반드시 진공 상태에서만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는 영국 본사를 포함해 중국, 대만, 미국 등 여러 나라에 생산 시설을 두고 있으며, 한국에도 충남 천안에 에드워드코리아 공장이 있다.
임주형 기자 skepped@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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