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기존 기업의 몰락, 신생업체 때문일까
비디오 대여 1위 블록버스터, 블랙베리의 몰락
내부의 조직적 저항과 기득권 수호에 발목
세계 최대 동영상 스트리밍업체 넷플릭스도 한때 매각을 고려한 적이 있습니다. 2000년대 초 누적된 적자와 불투명한 미래를 고민하던 넷플릭스 경영진은, 그들의 경쟁사이자 비디오 대여시장 1위 업체 블록버스터에 피인수를 제안합니다.
블록버스터 경영진은 단칼에 거절합니다. 오히려 코웃음을 쳤죠. 블록버스터는 미국 전역에 거미줄 같은 오프라인 매장망을 구축하고 있었고, 넷플릭스는 성장이 불확실한 스타트업에 불과했습니다.
이때 딜이 성사됐다면, 오늘의 넷플릭스는 없었을 겁니다. 매각 제안가는 5000만달러(약 680억원)였다고 합니다. 지난달 5월 넷플릭스의 시가 총액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5000억달러(약 700조원)이었죠.
블록버스터를 무너뜨린 건, 넷플릭스가 아니다
블록버스터는 10년 후 파산합니다. 넷플릭스는 스트리밍 시장의 지배자로 우뚝 서게 됩니다. 블록버스터의 파산은 흔히 '넷플릭스라는 혜성같은 스타트업의 등장'으로 설명되곤 합니다. 그러나 그걸론 부족합니다. 어떻게 보면 블록버스터를 무너뜨린 건, 그들 자신이었습니다. 단순한 경영 실패가 아니라, 조직 내 권력 역학이 혁신을 저지한 사례입니다.
넷플릭스는 시장에 등장하면서부터 물리적으로 더 작고 견고한 DVD 기술을 활용했습니다. 그리고 '구독'을 비즈니스 모델로 삼았죠. 소비자는 DVD를 3개까지 빌릴 수 있었고, 반납기한이 없었습니다. 소비자는 대여점을 방문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DVD는 우편으로 배달됐죠. 이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방식이었습니다. 블록버스터 대여점 일부는 연체료로만 수입의 30% 이상을 올렸으니까요.
블록버스터의 경영진이 변화를 거부했던 건 아닙니다. 그들은 넷플릭스 방식에서 어떤 가능성을 찾습니다. 비슷한 모델을 구축하죠. 차이가 있다면, 우편이 아니라 대여점에서 소비자가 직접 빌리고 반납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소비자의 반응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 모델은 이내 중단되고 맙니다.
앞서 말했듯, 블록버스터의 비즈니스 모델은 대여 가맹점과 연체료 수입에 크게 의존했습니다. 넷플릭스 모델을 전면적으로 도입하려면 대여점들은 이 수익을 포기해야 했던 것이죠. 대여점들의 반발이 거셌습니다. 블록버스터 경영진은 변화의 필요성을 결코 모르지 않았지만, 기존 구조 내에서 그 변화를 실행하기에는 저항이 너무 강했습니다.
이 사례는 신기술 도입이 단순한 기술적 결정이 아니라, 조직 내 권력 구조를 재편하는 복잡한 과정임을 보여줍니다. 블록버스터의 경우, 기존 권력 구조(대여점주들)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움직임이 결국 전체 기업의 몰락으로 이어진 겁니다.
영국군 vs 독일군 : 탱크를 대하는 자세
신기술로 이익을 거두기 위해서는, 단순히 기술을 도입하는 것만으론 부족합니다. 기존 조직 구조를 뒤엎는 수준의 과감한 결단과 전략이 필요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 말 영국은 전장에 새로운 무기를 가져옵니다. 탱크였죠. 탱크는 말이 여전히 뛰어다니던 전장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혁신적인 무기였습니다.
그러나 전쟁 후 영국 육군은 탱크를 기존 기병대 조직에 단순히 통합시키고 맙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기운이 퍼지며, 독일이 재무장을 시작한 상황이었지만, 영국의 대응은 놀라울 정도로 구시대적이었죠.
당시 영국 육군 원수 아치볼드 몽고메리-매싱버드경은 "말의 사료를 10배 이상 늘리라"고 지시합니다. 그리고 기병 장교에게는 말 두 필, 탱크 장교에게는 말 한 필을 제공하죠. 이는 새로운 기술을 기존 조직 구조와 전략에 억지로 맞추려는 시도였습니다.
반면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군 조직이 와해된 독일은 달랐습니다. 탱크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바라봤죠. 그들은 백지장에서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기술에는 새로운 조직과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다'는 걸 이해했습니다. 독일은 '전격전'(Blitzkrieg)이라는 새로운 전략을 개발했고, 심지어 영국군을 초청해 시범을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영국은 기존 권력 구조(기병대)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기술을 끼워 맞추려고만 했습니다. 그 결과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독일의 전격전 앞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기존 조직 구조를 고수할 필요조차 없었던 독일군으로선, 오히려 그 점이 행운이었던 셈이죠.
블랙베리 vs 아이폰 : 강점은 약점이 될 수 있다
[블랙베리 사진 : 블랙베리의 키보드는 타이핑 정확성이 높았고, 문자·이메일 작성에 최적화되어 있었습니다. 직장인들과 고위 임원들, 정치인들이 특히 선호했죠.]
블랙베리와 애플의 휴대폰 경쟁 역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00년대 후반 블랙베리는 휴대폰 시장의 절대강자였습니다. 물리 키보드가 핵심 경쟁력이었죠. 이메일과 문자에 최적화되어 있었습니다. 배터리 수명도 길고 튼튼했죠.
2007년 아이폰은 사뭇 달랐습니다. 일체형 배터리, 키보드가 없는 터치스크린, 직관적인 인터페이스를 내세웠죠. 얼핏 보기엔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는 엉성한 기기였습니다. 당시 휴대폰·IT업계는 애플이 실패할 것이라 예견했죠.
그러나 아이폰의 힘은 기능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이폰은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통합한 새로운 구조를 설계했죠. 직관적 사용 환경은 기술의 문턱을 낮추는 혁신이었습니다. 누구나 앱스토어에 들어와, 필요에 맞는 앱을 출시할 수 있었죠. 개발자에게도 소비자에게도 도움이 되는 방식이었습니다.
물론 아이폰이 시장을 지배하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2007년 블랙베리는 역대 최고의 판매량을 달성했죠. 이는 역설적으로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아이폰 쇼크'를 당대에 목격하고, 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한 기업은 딱 한 곳, 구글이었습니다.
아이폰을 향한 조롱이 계속되는 동안, 아이폰과 안드로이드 기반 스마트폰은 시장을 야금야금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블랙베리가 '뭔가 잘못됐다'는 걸 인식하고 대응하려 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때였죠. 기존의 기업 구조와 제품 철학으로는 급변하는 스마트폰 시장에 빠르게 적응하기 어려웠습니다.
AI 도입을 앞둔 기업의 과제 : 내부 저항에 맞설 용기
지금까지 살펴본 사례들은 새로운 기술의 도입이 단순한 기술적 결정이 아니라, 조직 내 권력 구조의 변화를 수반하는 복잡한 과정임을 보여줍니다. 기존 권력 구조와 이해관계를 유지하려는 저항이 궁극적으로 조직의 적응 실패로 이어진 사례들이죠.
이는 인공지능(AI)을 도입하려는 조직, 회사가 필연적으로 맞닥뜨릴 문제입니다. 제품, 서비스, 기업명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는 모두가 같은 저항에 직면하게 됩니다.
AI와 같은 신기술은 단순히 기존 업무를 효율화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합니다. 백지장 상태에서 출발한 독일군이 탱크로 새로운 전략을 개발할 수 있었듯이, 때로는 기존 조직 구조를 완전히 재구성하는 것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AI의 도입으로 인해 기존 권력이나 이익을 잃을 수 있는 이해관계자들을 예측·식별하고, 그들의 우려를 해소하거나 변화에 참여시킬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공적인 기술 도입, AI 혁신은 단순히 최신 기술을 들여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져올 조직적·문화적 변화를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블록버스터, 영국군의 탱크 활용, 블랙베리의 사례는 바로 그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김동표 기자 letmei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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