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옥계항 코카인 2톤 밀반입 사건 공소장
페이스북·왓츠앱 항로 공유
기관실 코퍼댐에 마약 56자루 숨겨
전문가 "공급자 추적, 국제공조 강화해야"
"자정에 접선, 항로 찍어서 수시로 보내달라."
선박 안 선원들과 외부 마약상들은 왓츠앱과 페이스북 등 메신저를 '작전 통신망' 삼아 예정 항로와 적재 계획을 수시로 공유했다. 그들이 준비한 작전은 시가 8450억원 규모, 1.7t에 달하는 남미발 코카인을 몰래 반입하는 일이었다. 전례 없는 규모의 밀반입 시도는 선박 기관실 깊숙이 마약을 숨기고, 선원들이 항로를 공유하며 조직적으로 움직인 '마약 작전'은 강릉 옥계항에서 적발돼 미수에 그쳤다.
12일 주진우 국민의힘 의원실이 입수한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춘천지검 강릉지청은 필리핀 국적 선원 2명을 지난달 20일 구속기소 하면서 이 같은 내용을 공소장에 적시했다. 이들은 강릉 옥계항에 입항한 선박 L호에서 적발된 코카인을 직접 소지 및 운반한 혐의를 받는다.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구속기소 된 선원 중 한 명은 L호의 조리원으로 근무하던 동료로부터 "400만 페소(약 1억원)를 줄 테니 코카인을 운반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이를 수락한 그는 선상에서 마약상들과 왓츠앱과 페이스북 메신저를 통해 항로와 접선 일정을 공유하며 밀반입을 준비했다. 선박이 항로를 따라 항해하는 동안 그는 일정 정보를 계속 보내며 조직과 실시간으로 소통했다. 그리고 지난 2월 8일 자정, 페루 해안에서 약 50km 떨어진 해상에 접선한 2척의 보트에서 코카인이 선박으로 옮겨졌다. 시간은 약 2시간 반이 걸렸다.
바다 한가운데 뜬 L호에 보트 2대가 접근하자 선원 3명은 철저한 역할 분담을 하고 움직였다. 먼저 기관원과 갑판원은 보트가 다가오는지 감시하면서 마약상들이 배에 오를 수 있도록 사다리를 설치했다. 또 L호의 2기사는 코카인을 은닉할 장소를 사전에 확보한 뒤, 보관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날 오전 2시 30분께까지 약 1kg 단위로 포장된 코카인 1690㎏은 자루 56개에 나눠 운반됐고, 선박 기관실 코퍼댐(기름 유출 등을 방지하기 위한 선박 내 빈 공간)에 은닉했다고 검찰은 밝혔다.
항로를 공유하던 갑판원과 함께 구속기소 된 또 다른 갑판원은 "300만 페소(약 7500만원)를 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L호의 해도 사진을 마약상들에게 보내는 방식으로 3월 20일께부터 공모에 가담했다. 그는 수차례에 걸쳐 항로 정보를 마약상들에게 전송했고, 선박은 결국 4월 2일 강릉 옥계항에 도착했다.
하지만 마약은 끝내 한국 땅을 밟지 못했다. 미국 연방수사국(FBI)과 국토안보수사국(HSI)으로부터 첩보를 받은 해양경찰청과 관세청은 L호가 입항한 다음 날 수색을 벌여 선박 내부에서 코카인을 발견했고, 현장에 있던 선원들을 긴급 체포했기 때문이다. 이후 검찰은 주범 외에 방조 혐의로 필리핀 국적 선원 2명을 추가로 구속기소 했고, 배에서 먼저 하선한 공모자 4명에 대해서도 체포영장을 발부해 추적 중이다.
이들이 들여오려던 코카인 양은 5700만명이 동시에 투약할 수 있는 분량에 달한다. 전문가들은 단순 운반자 처벌만으로는 범죄를 막기 어렵다며, 공급지를 추적할 과학수사와 국제 공조 시스템 등의 대응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강릉 옥계항 사건 공소장 내용을 본 전직 마약수사관은 "이번 사건처럼 선원에게 고액 보수를 제시하고 운반을 맡기는 '아르바이트식 마약 운반'은 점조직 형태라 윗선 추적이 매우 어렵다"며 "범죄조직은 일회용으로 사람을 갈아 끼우는 구조기 때문에 단순 운반자만 처벌해선 근절 효과가 없다"고 말했다. 박성수 세명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마약류에 대한 위장 수사, 공급자 DNA 분석 등 다양한 기법을 수사에 도입해야 한다"며 "단순 투약자 처벌보다 공급망 전체를 겨냥한 근본적 대응으로 방향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마약 수사 검사 출신인 김희준 법무법인 LKB 변호사는 "마약이 유통 방식 자체가 텔레그램 마약방 같은 온라인으로 거래되니까 위장 수사 가능하도록 법이 바뀌어야 할 시점"이라며 "신분을 숨기고 장기간 관찰할 수 있는 언더커버 제도 도입해야 공급책 밝혀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염다연 기자 allsalt@asiae.co.kr
구채은 기자 faktu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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