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기간망 사업이 기초지자체의 정치적 셈법에 따라 좌초될 위기에 놓였다. 한국전력이 추진 중인 동서울변전소 증설 사업 이야기다. 동해안에서 생산된 전기를 수도권으로 보내기 위한 송전선로의 마지막 관문이 하남시다. 나머지 구간은 이미 완공됐다. 그러나 하남시가 인허가를 내주지 않으면서 이 전력망은 마치 고속도로의 마지막 톨게이트가 막힌 채 방치된 셈이 됐다.
하남시의 논리는 '주민 수용성'과 '전자파 우려'다. 그러나 한전은 이미 여러 차례 설명회를 자발적으로 개최하고, 외관을 주민 친화형 랜드마크로 설계하고 있으며, 전자파도 전문기관을 통해 냉장고 정도의 수준임을 입증해왔다. 변전소도 기존 부지 안에서만 증설된다. 수많은 보완책이 나왔지만 하남시는 여전히 허가를 내주지 않고 있다.
한전 관계자들이 "전력 공급이 시급하다"는 팻말을 들고 하남시청 앞에서 1인 시위까지 벌이게 된 상황은 전력망 공사 지연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절박한 신호다. 그런데도 하남시는 아무런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고 추가 설득만 요구한다. 전력망의 완성 시점이 늦춰질수록 국가적 손실이 커진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전자파가 암을 유발할 정도로 위험하다"는 주장 역시 "선풍기 틀고 자면 죽는다"는 말처럼 과학적 근거 없이 공포만 확산시킨다. 공익시설의 증설을 괴담 수준의 정서가 좌우하는 게 바람직한가.
이 지연이 낳는 결과는 간단치 않다. 동해안의 값싼 전력을 수도권에 공급하지 못하면 서울과 경기 지역은 더 비싼 전기를 써야 한다. 연간 3000억원의 전기요금 인상 요인이 생기고 이는 전 국민이 부담하게 된다. 전력망은 모두가 사용하는 인프라다. 특정 지역의 입장이 전체 국민의 부담으로 전가되는 구조는 국가 시스템을 근본부터 흔든다.
더구나 하남시가 요구하는 주민 혜택의 수준은 현실과 괴리가 크다. 서초구에 있는 한전아트센터 사례를 들어 "문화예술 공간도 만들어 달라"는 요구까지 나온다. 하지만 전국에 900개 넘는 변전소가 있는 상황에서, 수백억원대 아트센터를 지어주는 게 관행이 되면 공기업도, 국고도 버틸 수 없다. 지역 편익을 위한 요구가 어느 선을 넘으면 공공 인프라를 볼모로 한 '거래'로 비쳐질 수 있다.
이쯤에서 한 가지 불편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혹시 내년 지방선거를 의식한 '시간 끌기'는 아닌지 말이다. 하남시의 입장을 주도하는 이는 이현재 시장이다. 지금 주민 반대를 자극하거나 결정을 유보하는 것이, 일부 유권자층의 지지를 끌어올리는 데 유리하다는 정치적 계산이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국가사업을 둘러싼 갈등이 지역 선거의 무대 소품이 돼선 안 된다.
물론 지방정부는 주민 의견을 대변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국가 기반 인프라가 작동할 수 있도록 돕는 책임도 있다. 특히 에너지, 교통, 통신 같은 공공성 높은 분야에서는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 국가적 이익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 '지방분권'이란 이름 아래 벌어지는 무책임한 행정 유보가 결국은 지역경제를 포함한 국가 전체의 손실로 돌아온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치는 타이밍을 재지만 전력망은 멈추면 꺼진다. 하남시가 진정 주민을 위한다면 국가와의 협력을 선택해야 한다. 더 늦기 전에, 이 상식적인 선택이 이뤄지길 바란다.
세종=강나훔 기자 nahu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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