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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다이어리]"엄마 사인해줘요" 美 초등학교에서 배운 '평가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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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사인해줘요".


미국 뉴저지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매주 한 번 이상 시험지를 내밀며 하는 말이다. 4학년 첫째 아이는 물론 2학년 둘째 아이조차 매주 수학, 사회, 과학, 어휘 등 다양한 시험을 치른다. 단순히 아이들이 시험을 보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교사는 시험지에 자세한 피드백을 적어 보내고, 학부모는 결과를 확인한 뒤 사인을 해 교사에게 다시 제출해야 한다. 미국에 처음 특파원으로 와 아이들을 키우며 놀란 것 중 하나가 이처럼 학교 시험이 유독 잦고 평가 또한 세심하게 이뤄진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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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미국 초등학교 시험이 '줄 세우기' 식은 아니다. 평가 결과는 '기대 이상', '기대 부합', '기대 이하' 세 단계로 나뉜다. 이른바 절대평가 방식이다. 정답 개수와 점수는 공개되지만 아이가 반에서 몇 등인지는 알 수 없다. 학부모는 매주 교사가 집으로 보내는 시험지를 통해 아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확인하고 교사의 피드백을 함께 받아 본다. 아이도 시험을 준비하고, 결과를 되돌아보는 과정을 통해 배운 내용을 스스로 점검하고 보완한다. 일주일마다 날아드는 시험지 몇 장이 아이 학습의 나침반이 돼 주는 셈이다.


큰 아이는 미국에 오기 전 한국에서 초등학교 3학년을 마쳤다. 당시에도 단원평가 같은 시험이 있었지만, 시험 횟수는 미국보다 훨씬 적었고 결과에 대한 교사의 피드백도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었다. 공식적인 중간·기말고사는 이미 폐지된 상태였고, 아이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학교보다 학원에서 확인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연스럽게 수학, 영어 같은 주요 과목은 학원에서 시험을 보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며 학부모의 불안을 달랬다. 학습 평가의 무게중심은 이미 공교육보다 사교육 쪽으로 기운 구조였다.


최근 대법원이 서울시 초중고교생의 기초학력 진단검사 결과를 학교별로 공개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서울시의회가 추진한 이 같은 조례안에 대해 서울시교육청이 서열화와 과열 경쟁을 우려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대법원은 이를 위법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학교는 아이들에게 공동체 가치를 길러주는 공간이지만, 동시에 학습을 책임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교육기관이다. 아이들은 배워야 하고, 부족한 부분은 채워져야 한다. 평가 없는 교육은 이 기본조차 놓치게 만들고, 결국 아이들의 교육받을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

기자가 거주하는 뉴저지에서는 주(州) 교육청이 공립학교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를 평가하기 위해 해마다 주 단위 일제고사인 NJSLA를 실시한다. 학생의 학업 이해도를 평가하고, 학교의 교육 기능을 점검하는 수단이다. 성취도 결과는 학교 간 비교 지표로 활용되고, 각 학교는 더 나은 성과를 위해 학생들을 집중 지도하고 시험 준비까지 시킨다. 일제고사 시즌이 되면 교사도, 학생도 한 달여 전부터 복습과 모의고사에 매달린다. 최근 NJSLA를 치른 10살 큰 아이는 한 달 동안 읽기, 쓰기, 문법, 수학 등 여러 과목을 집중적으로 준비했다. 결국 학교가 앞장서 아이들의 학습을 끌고 가는 구조다. 이를 놓고 서열화나 경쟁 조장을 우려하는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2011년 서울, 2019년 전국에서 초등학교 시험이 폐지된 한국에선 볼 수 없는 풍경이다.


평가 없는 교육은 필연적으로 학습 격차를 만든다. 공교육이 손을 놓으면 사교육이 그 자리를 메우고, 그마저도 어려운 아이들은 가장 기본적인 교육 기회조차 놓치게 된다. 아이가 시험지를 내밀며 "엄마, 사인해줘요"라고 말하는 순간, 공교육은 가장 기본적인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에 돌아가서도 그 말을 다시 듣고 싶은 마음은 기자의 지나친 욕심일까.





뉴욕(미국)=권해영 특파원 rogueh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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