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단체전 양상 띄는 반도체 전쟁
부처 갈등·규제에 발목 잡힌 韓
정부가 주도하는 팀플레이 절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인공지능(AI) 패권경쟁의 핵심인 반도체 기업들은 이미 오징어게임 한가운데에 있다. 살아남느냐 도태되느냐, 생존이 달린 게임이 진행 중이다. 기술이 가장 중요하지만 기술 하나만으로 승부하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 생존하려면 법과 제도, 외교와 자본, 인재와 인프라까지 총동원된 국가 단체전이 필요하다. 문제는 한국이 여전히 개인전 방식으로 뛰고 있다는 데 있다. 경쟁의 양상은 달라졌지만 대응 방식은 과거의 연장선에 머물러 있다.
첫 게임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미국은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의 움직임을 통제하기 위해 법과 규제를 설계하며 판을 짜고 있다. 엔비디아, 브로드컴 등은 이 프레임 안에서 안정적으로 생존과 성장의 기회를 만든다. 인텔은 최근 경쟁에서 밀리고 있으며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는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을 TSMC에 넘기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정부가 산업 전반의 룰을 설계하고 기업들은 그 규칙 안에서 전략을 재정비하고 있다.
두 번째 게임은 '유리다리'. 중국은 미국의 제재를 피해 반도체 산업을 키워야 한다. YMTC, CXMT 같은 기업들은 발을 내디딜 때마다 규제에 걸릴 수 있는 유리판 위를 걷고 있다. 그럼에도 중앙정부는 전략을 세우고 지방정부와 국유 펀드가 실행을 맡는다. 장비는 정책금융으로 조달되고 적자는 펀드가 떠안는다.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생존의 길을 뚫는다. 고립됐지만 절대 물러서지는 않는다.

넷플릭스 오리지널시리즈 '오징어게임2'의 공개일인 26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 오징어게임 캐릭터 '영희' 조형물과 홍보 현수막이 설치돼 있다. 강진형 기자
세 번째는 '줄다리기'. 대만의 TSMC는 중앙정부, 지방정부, 전력회사, 외교라인까지 국가 전체와 줄을 함께 잡고 있다. 공장 부지가 정해지면 인프라가 먼저 깔리고 기업은 그 위에 올라선다. 외교 현장에서도 TSMC는 주요 안건으로 거론된다. 줄을 당길 때 TSMC는 하나의 기업이 아니라 하나의 체계다.
네 번째는 '설탕과자 뽑기'. 일본의 반도체 위탁생산 기업 라피더스는 '일본 반도체 부활'이라는 복잡한 모양틀을 손에 쥔 채 막대한 정부 자금과 IBM과의 첨단 기술 협력을 바탕으로 정해진 미션을 수행 중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디에 있을까. 한국 반도체는 지금 '구슬치기'에 갇혀 있다. 같은 편인 정부, 기업, 정치권이 서로를 겨누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와 기획재정부는 세제를 두고 몇 년째 평행선을 달린다. 노동 유연화, 수도권 규제, 전력과 용수 같은 인프라 과제도 논의만 반복된다. 기업은 실시간으로 기술 경쟁과 투자 타이밍을 재고 있지만 정부는 여전히 부처 간 이해관계와 정파적 셈법에 얽매여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오징어게임의 룰은 냉혹하다. 미션 하나만 실패해도 퇴장이다. 지금 우리 기업들에 필요한 것은 부처별 로드맵이 아니다. 줄다리기에서 팀워크가 무너지면 모두가 끌려가는 것처럼 반도체 산업도 각자의 전략만으로는 버틸 수 없다. 생존을 위해선 판 전체를 보는 시야와 산업 전체가 움직일 수 있는 작전이 필요하다. 정부는 지켜보는 관전자가 아니라 중심에서 줄을 함께 잡아야 한다. 전력과 용수, 입지 같은 기반 인프라는 민간이 감당할 수 없다. 인재 양성도 정부가 틀을 바꿔야 가능하다.
한국 반도체는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로 꼽히던 참가자였다. 하지만 단숨에 게임의 룰이 바뀌었다. 더 이상 개인기는 통하지 않는다. 끝까지 살아남으려면 '깐부정책'이 필요하다.
박소연 산업IT부 차장 mus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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