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노동시장 경직성 해소가 선결 과제
성과책임 없는 근무시간 단축은 위험
관세율이 시시각각 변하는 불안정한 국제 정세 속 국내 정치도 혼란스럽다. 한국 기업들은 국제적 불확실성과 국내 압박을 동시에 견뎌야 하는 상황에 처했고, 그 어느 때보다 경영이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최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주 4일제' 도입 주장에 국민의힘은 '4.5일제' 공약으로 맞불을 놓았다. 정치권은 주 4일제를 실험하는 국가가 늘어나는 국제적 추세를 언급하며 한국도 단계적 도입을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더불어민주당은 자율 기반의 첨단기술 사회를 위해 노동시간 단축이 필수적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나 이 제도가 현재 한국에 적합한지는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OECD의 '고용 보호 지수'에 따르면 한국은 정규직 해고 보호 수준이 2.3점으로, OECD 평균(2.1점)보다 높아 노동시장 유연성이 낮은 편이다. 반면, 주 4일제를 도입하거나 검토 중인 아이슬란드(1.9점), 벨기에(1.8점) 등 북유럽 국가들은 노동시장 유연성이 높다는 특징을 공유한다.
이들 국가는 해고가 비교적 용이하고 기업이 인력을 탄력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 있고, 따라서 성과 중심 근무 문화가 정착되어 있다. 이에 자연히 주 4일제는 근로자의 권리이자 책임이며, 적은 시간 일하는 대신 확실한 성과가 요구되고, 성과가 미진할 경우 언제든 해고될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근로시간 단축이 오히려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반면 한국은 자유에 따른 책임을 묻기 어려운 노동환경이다. 노동시간이 줄어들어도 성과나 생산성이 유지되지 않을 경우에도 해고가 쉽지 않다. 한국 노동시장은 정규직 중심의 강력한 고용 보호와 강성 노조로 인해 전체적인 유연성이 매우 낮다.
현시점에서 한국은 주 4일제를 논의할 단계가 아니다. 노동시장은 여전히 경직되어 있고, 정규직 과보호와 강성 노조로 인해 기업, 특히 대기업의 유연한 인력 운용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급격한 변화와 글로벌 위기에 대응해야 할 시점에, 생산성을 높이거나 인력을 전략적으로 배치하려 해도 현행 제도와 규제가 발목을 잡는다.
한국의 경우, 노동 유연성과 책임이 전제되지 않은 채 단순히 근무시간만 줄이는 것은 생산성 저하와 국제 경쟁력 약화로 직결된다. 기업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서는 근무 시간과 보상 체계의 자율적 설계 권한이 보장돼야 한다.
혁신을 거듭한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자율성과 유연성을 바탕으로 성과 중심의 근무 방식과 파격적인 보상 구조를 설계해 글로벌 경쟁력을 키워왔다. 글로벌 기업이 즐비한 싱가포르는 특정 임금 수준 이상의 근로자에 대해 고용주와의 계약에 따라 근무 조건이 결정되도록 해, 기업들의 인재 확보 경쟁과 노동자들의 자유로운 선택을 가능케 했다.
이는 주 80시간 일하며 고소득을 추구하는 인재는 그에 맞는 기업에, 적정 시간 근무와 적정 급여를 원하는 인재는 다른 기업을 선택할 수 있게 근무시간과 보상 체계를 기업 재량에 맡기는 방식이다. 더 일해 더 많이 벌겠다는 야망을 존중하는 노동·보상 체계가 혁신과 성장의 핵심이다.
SK하이닉스, 삼성전자 같은 기술 기업들이 매일 밤을 새워 미세공정, 신소재, AI 기술 개발에 매진해도 부족한 상황에서, 생산시간 단축 제도화는 이들이 국제 경쟁에서 뒤처지도록 정부가 등을 떠미는 격이다. 첨단 기술을 선도해야 할 중요한 시기에, 국가가 오히려 기업의 역량 발휘를 제한하는 셈이다. 기업이 경쟁력을 잃으면 결국 노동자, 즉 시민의 삶의 질도 저하된다.
한국이 주 4일제를 진지하게 논의하려면, 그에 앞서 해고와 채용의 유연성, 초과 근로에 대한 자율성, 성과와 보상의 연동이 가능한 유연한 노동시장의 제도적 기반이 선제적으로 마련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한국은 이 모든 전제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주 4일제는 아직은 요원한 미래의 과제일 뿐이다. 보다 시급한 것은 정치적 '포장'이 아니라, 한국 기업들이 활력을 되찾을 수 있는 유연한 노동시장 환경을 조성해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경제 성장을 이끄는 것이다.
경나경 싱가포르국립대 컴퓨터과학과 교수
꼭 봐야할 주요뉴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