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 의약품 유통 구조
과점 구조 갖춘 도매 업체들
불균형·부작용 나오는 업계
①누구를 위한 '유통공룡'인가
②온라인 플랫폼발 지각변동, 시장 흔들까
③"디지털 전환, 투명성 제고로 개혁해야"
"이 입덧약은 없어요."
지난달 서울 시내의 한 약국. 입덧이 심한 30대 임산부 임모씨는 산부인과에서 처방받은 입덧약을 구매하려고 서울 시내의 한 약국을 찾아갔다가 약사로부터 이런 대답을 듣고는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다른 약국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기도 어려운 노릇이었다. 임씨의 하소연에 의약품 도매업체 몇 군데에 전화를 돌려본 약사는 "지금 주문해도 일주일 정도는 지나야 찾으시는 약이 들어올 것 같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 약국에는 왜 그 약이 없었을까. 임씨의 경험은 보통 사람들이 잘 모르는 의약품 유통구조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16일 제약 및 의약품 유통업계에 따르면 우리가 약국에서 접하는 의약품은 거의 일률적으로 의약품 도매업체를 통해 제약사에서 약국이나 병원으로 전달된다. 약국 또는 병원이 도매업체에 의약품을 주문하면 제조사에서 생산한 제품이 1차 도매상, 때로는 2차 도매상을 거쳐 주문자에게 배송되는 것이다.
이 같은 의약품 유통망은 오프라인 영업 조직을 기반으로 꾸려져 있다. 약국이 약을 주문하려면 영업사원에 직접 전화를 하거나 개별 온라인 애플리케이션(앱)에 접속해야 가능하다. 그마저도 개별 도매 업체들의 의약품 재고가 확인이 안 되면 수차례 전화를 걸거나 여러 앱을 실행해봐야 하는 형편이다. 유통 과정이 이렇다 보니 소비자들은 원하는 약을 찾기 위해 약국 이곳저곳을 헤매거나 수일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국내 의약품 시장의 양적 성장에 비해 수급 절차는 여전히 후진적이라는 평가가 그래서 나온다.
이 복잡다단한 구조는 30년 전부터 형성됐다. 1994년 정부는 '의약품 유통일원화' 원칙을 법제화했다. 이는 제약회사가 유통 과정에 신경을 쓰지 않고 연구개발(R&D)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의약품 공급은 오직 전문 유통업체만 담당하도록 규정한 것이다. 당시에는 제약사들이 유통까지 직접 관리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런 탓에 R&D에 역량을 집중하지 못할뿐더러 임의적인 유통방식 때문에 의약품 관리상의 문제가 발생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유통 일원화 원칙이 폐지된 2010년 이후에도 도매상의 영향력은 강력하게 유지되고 있다. 의약분업으로 인해 병원과 약국은 처방전에 따라 재고를 관리해야 하기 때문에 많은 품종을 소량으로 자주 배송받아야 한다. 제조사가 직접 병원이나 약국과 거래하기 어려운 이유다. 이로 인해 도매상은 물류 효율성을 내세워 자신들의 입지를 넓혔다. 1994년 이전 23%에 불과하던 유통일원화율은 꾸준히 올라 2021년 기준 91%에 달했다.
문제는 이런 흐름 속에 뿌리내리고 있는 과점 구조다. 현재 국내 의약품 도매업체는 약 4700곳에 이르는데, 이 가운데 0.2%에 불과한 상위 10곳의 '공룡업체'들이 시장 전체의 매출(약 25조원) 중 70%인 18조원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국내 최대 의약품 도매업체인 지오영을 비롯한 일부 업체들은 전국에 수십 개의 물류센터와 자체 배송망을 운영하고 있다.
넓은 배송망과 취급 품목의 다양성 같은 장점이 있지만, 이 같은 과점 구조는 시장 내 불균형과 부작용을 초래한다는 지적이다. 사람들이 선호하는 의약품을 가능한 한 많이 가져다가 판매하는 '시장경쟁'의 원리가 도매상, 특히 대형 도매업체들이 구축한 '규모의 경제'에 압도당하는 것이다. 평소 집 근처 약국에서 별문제 없이 구매했고 인지도가 높아 많은 사람이 복용하는 특정 의약품이 회사 근처 다른 약국에는 없어 애를 먹는 경험의 배경이다.
이런 가운데 중소 도매상들은 대형 도매 업체의 하청 또는 보완망으로 전락했다. 일부 도매업체는 마이너스 마진을 감수하며 병원 납품 경쟁을 벌이기도 한다. 수도권의 한 중소 도매업체 대표는 "일단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병원과 계약을 맺고, 손해는 다른 제품으로 만회하는 구조"라며 "소수 업체들의 과점·저마진 구조로 인해 의약품 유통 품질이 떨어지고 소비자 피해로 돌아올 것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정동훈 기자 hoon2@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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