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신이 전하는 '섯알오름'의 비극
알뜨르 비행장의 숨겨진 역사
군사기지에서 학살터로…제주 4·3의 그림자
오늘날 '평화의 섬'이라 불리는 제주도. 그러나 이 섬에 다섯 개의 군용 비행장이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제주의 하늘을 수놓던 활주로는 단순한 군사시설이 아니었다. 일제의 침략 전초기지였고, 패전 직전엔 '본토결전'이라는 이름으로 특공기들이 날아오를 준비를 하던 곳이었다.
해방 후, 비행장 일부는 민간 공항으로 변모했지만, 어떤 곳은 한국전쟁 와중에 또 다른 비극의 장소가 되었다. 비행장으로 점철된 제주의 땅은 4·3의 상흔과 이어져 있었다.
알뜨르비행장, 제주에서 시작된 아시아 침공의 전초기지
1933년 일본 해군은 제주에 처음으로 비행장을 건설했다. 바로 알뜨르비행장이었다. 애초 중국 침략을 위한 항공기의 중간 기착지로 쓰였던 이곳은, 중일전쟁이 본격화되면서 활주로와 부속시설을 대대적으로 확장했다.
알뜨르비행장은 난징 공습을 위한 전진기지였다. 일본 해군은 이곳을 거쳐 36차례 중국 본토를 폭격했다. 전쟁 말기에는 가미카제 특공대의 발진 기지로도 이용됐다. 오늘날에도 알뜨르비행장은 국방부 소유로 남아 있다. 제주 남부 평야에는 여전히 가미카제의 비행장 흔적과 방공호, 격납고 터가 드러나 있다.
정뜨르비행장, 군용 활주로에서 제주국제공항으로
1942년, 일본 육군은 정뜨르비행장을 건설했다. 서비행장으로도 불린 이곳은 가미카제 육군항공대의 거점으로 사용됐다.
활주로는 1,800m와 1,500m 두 개로 구성됐으며, 전후 미군에 접수된 뒤 1957년 민간항공의 거점이 되었다. 현재 제주국제공항이 바로 이 정뜨르비행장의 뒤를 잇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제주 비행장에 세워진 일본군 비행기. 진드르 비행장은 제주 동비행장으로 불리며 가미카제 특공기 발진을 위한 활주로와 격납고 등이 계획된 장소였으나 지금은 활주로는 흔적조차 찾기 어렵고, 격납고 일부는 감귤 창고로 사용되고 있다. 사진 =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원본보기 아이콘진드르비행장, 동쪽에 세워진 비행장…흔적만 남다
1945년 초, 조천읍 신촌리에 진드르비행장이 조성되었다. '제주 동비행장'으로 불리며, 가미카제 특공기 발진을 위한 활주로와 격납고, 탄약고, 병력 수용동굴까지 계획된 곳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패전으로 완공 여부가 불확실하게 남았고, 현재는 당시 비행장의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교래리 비행장, 내륙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비밀 비행장
같은 해 7월, 일본 육군은 조천읍 교래리에 내륙형 비행장을 조성했다. 일본군이 비행장을 해안이 아닌 숲과 들판 깊숙한 곳에 만든 것은 특공기 출격을 위한 비밀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교래리 비행장은 활주로 두 개와 더불어 대규모 지하 격납고, 연료고, 병력 수용동굴을 갖췄다. 현재는 대한항공 정석비행장으로 활용되고 있지만, 시설 일부에는 당시 군용 비행장의 구조가 남아있다.
서귀포 비행장, 4·3의 산을 넘은 비행장
서귀포 비행장은 해방 이후 4·3사건 당시 경찰이 조성한 활주로였다. 서귀포시청 인근과 동홍천 일대 잔디밭에 마련된 이 비행장은 경비행기를 이용해 산악지대를 수색하는 데 활용됐다.
이곳은 4·3이 진압된 뒤 사용되지 않았고, 1970년대 민간에 분양되면서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다.
섯알오름 학살, 집단 사형장이 된 알뜨르 비행장
섯알오름은 알뜨르비행장 옆 작은 언덕 지형으로 일제강점기에는 탄약고와 방공호로 활용된 군사시설이었다. 그러나 1950년 여름, 이곳은 학살의 현장으로 변했다. 한국전쟁 직후, 경찰은 제주4·3사건 전력자를 중심으로 예비검속을 단행했다. 이들 가운데 D·C 등급으로 분류된 주민들은 해병대에 넘겨졌다.
군 트럭에 실려간 주민들은 모슬포 비행장 동쪽 섯알오름의 구덩이로 향했다. 가족에게 알릴 길조차 없던 그들은 트럭 위에서 자신이 신던 검정 고무신을 길가에 던졌다. 지나던 길목마다 고무신이 흩어졌고, 뒤늦게 그 길을 따라간 가족들은 마을 사람들이 버려놓은 것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고무신을 보고서야 가족의 끌려감을 알게 된 것이다.

알뜨르비행장의 탄약고와 방공호로 사용되던 섯알오름의 구릉지대는 한국전쟁 이후 4·3사건 전력자를 중심으로 단행된 '예비검속'이란 미명하에 일반 주민을 학살한 잔혹한 피해현장이 됐다. 사진 = 김희윤 기자
원본보기 아이콘이승만 정부의 지시에 따라 경찰은 제주4·3사건에 연루된 이들과 요시찰인을 일제히 검거했다. 경찰서 마다 "불순분자를 예비검속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모슬포경찰서는 절간고구마창고와 어업조합창고, 무릉지서 창고 등을 임시 유치장으로 사용했다.
"부모님 얼굴이라도 볼 수 있을까 싶어 창고 문틈을 들여다봤어요. 그런데 관리인들이 '너도 죽고 싶냐'고 으르렁댔죠."
생존자 이성희(가명) 씨는 부모가 절간고구마창고에 구금됐던 날을 생생히 기억했다. 쌀을 전달하러 갔을 때, 밥 짓는 연기 속에 사람들은 갇혀 있었지만 누구도 말을 걸 수 없었다.
"D등급이면 죽는다" 경찰은 예비검속자들을 A부터 D까지 급으로 분류했다. 그들에게 총구가 먼저 닿는 대상은 D·C 등급이었다. 이들은 7월 중순부터 8월까지 해병대에 넘겨졌다. 모슬포 비행장 인근 구덩이는 곧 집단 사형장으로 변했다.
이승만 정부의 '예비검속', 두 차례에 걸친 집단 학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제주 예비검속 사건(섯알오름)'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1950년 7월 16일부터 20일까지 1차 총살이, 8월 20일에 2차 총살이 이루어졌다. 현장에 있었던 해병대원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연병장에 모이라고 했고, 아무 설명 없이 트럭에 태웠습니다. 도착하니 중대장이 '폭도를 총살하라'고 했어요."
해병대원이었던 참고인은 보고서를 통해 당시 상황을 생생히 증언했다. 병사들은 총을 들었고, 민간인들은 손을 머리에 얹은 채 줄지어 섰다. 그중 일부는 총 대신 장검(니뽄도)으로 찔려 죽었다.
"구덩이 속에서 신음 소리가 계속 들려왔습니다. 이미 시신이 쌓인 곳이었죠."
사망자 다수는 4·3사건 관련자였지만, 보도연맹원이었단 증거는 없었다. 도리어 가족들은 "전쟁과 아무 상관없는 얌전한 농민이었다"고 증언했다. 경찰 내부에서도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끌려간 사람도 많았다"고 인정했다. 모슬포 두모지서에서 근무했던 당시 경찰 관계자는 "한라산에 갈 사람들은 다 갔고, 남은 사람은 얌전히 살던 사람들"이라 했다.
실제 희생자 중에는, 경찰, 서북청년단, 마을 유지의 모략에 의해 엉뚱한 이들이 잡혀 들어간 사례도 적지 않았다. 무고를 주장하는 피해 사례는 공식 조사에서 44건에 달했다.
확인된 희생자 217명…6년 동안 유해 방치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에서 당시 해병대 대대장은 "국방부에서 내려온 명령이었다"고 말했다. 지휘계통은 신성모 국방부 장관에서 손원일 해군총참모장, 신현준 해병대사령관, 모슬포 주둔 해병대 대대장으로 이어졌다.
확인된 희생자는 217명. 그러나 이는 확인된 숫자일 뿐, 기록되지 않은 이들의 이름이 섯알오름 구덩이 아래 함께 묻혔을 가능성도 높다.
희생자들은 모슬포경찰서 대정지서 관할 절간고구마 창고에 수감됐던 사람들과 한림지서 관할 한림항 어업창고에 수감된 주민들이었다. 7월 16일 1차로 20명이 섯알오름에서 총살당했고, 한 달 뒤인 1950년 8월 20일 191명이 또 다시 섯알오름에서 총살당했다. 나머지 90여 명은 1950년 9월경 방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섯알오름에서 가족이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주민들 수백명은 곧장 시신을 수습하러 달려갔지만, 방첩대 소속 군인들이 공포탄을 쏘며 위협하고 협박해 가족의 얼굴 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1956년 군부대 확장 공사 중, 매몰지에서 유해가 드러났다. 일제가 제주 주민을 강제징용해 만든 탄약고 터에 조성된 두 개의 구덩이, 주민들은 무려 6년이 지나서야 시신 수습에 나설 수 있었다고 말한다.
유해를 수습했지만, 이내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묘지와 비석마저 부서졌다. 한림리 출신 유족들이 60여 구의 시신을 1차로 수습했고,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대정지역 유족들이 학살 현장에서 유해 발굴을 시도했으나 군경의 저지로 실패한다. 유족들이 시신 수습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끝에 유해 발굴이 허용되자 시신이 수장된 물웅덩이에서 양수기로 물을 퍼내 149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유족들은 1990년대 들어 다시 유족회를 결성하고 진실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 2001년, 유족회는 진실·화해위원회에 사건 조사를 정식으로 요청했다. 그리고 사건의 전모가 세상에 드러났다. 죽음의 구덩이에 버려졌던 이들은 전쟁의 적도, 빨치산도 아닌 이웃과 가족들이었다. 단지 '불순'하다고 지목된 사람들이었다.
섯알오름의 총성은 멎은 지 오래지만, 유족들은 당시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반세기 넘는 시간동안 정부를 상대로 긴 싸움을 이어왔다. 비행장과 오름, 동굴과 참호가 남아있는 이 땅에서 4·3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이야기로 남아 있다.

알뜨르비행장, 그리고 섯알오름을 방문할 때 가지고 간 슈퍼8mm 카메라로 추모비 앞 검은 고무신을 담았다. 누군가 신어보지도 않은 새 신이 매해 이 곳에 놓여 희생자들을 기리며, 가족들의 가슴에 오래오래 남아있다. 영상 = 김희윤 기자.
원본보기 아이콘섯알오름, 그리고 검은 고무신
섯알오름에는 현재 희생자 추모비가 서 있다. 비석 앞에는 수십 켤레의 검정 고무신이 놓여 있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는 트럭 위에서 주민들이 던졌던 신발들, 그 고무신은 이내 살아남은 가족들의 마지막 기억이자 상징이 됐다.
그저 신발 한 켤레가 길 위에 떨어져 있었을 뿐이지만, 제주 사람들은 그것이 떠난 가족이 남긴 메시지임을 알았다. 섯알오름 학살은 단순한 전시범의 처형이 아니었다. 4·3의 연장선에서 이어진, 경찰과 군의 조직적인 민간인 학살이었다.
수십 켤레의 고무신은 마치 당시 시간이 그대로 멈춘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다만, 모든 고무신은 새신이다. 유족들이 해마다 챙겨놓은 것이다.
트럭에 실려가면서도, 가족에게 끌려간 사실조차 알릴 수 없었던 사람들. 그래서 마지막 순간에 신발을 벗어 길에 던졌다. 신발 한 켤레가 가족에게 전할 수 있는 유일한 신호였다.
길가에 널린 신발들을 주워들던 이들은 비로소 내 누이가, 아방이. 삼춘과 남동생들이 어디로 갔는지를 알아채고 눈물을 삼켰다.
섯알오름에는 비행장도, 총성도 사라졌지만, 고무신은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기억만은 땅속으로 묻히지 않았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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