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 변화속 유산 보존한 韓
서울 미래유산 제도 통해
무형의 기억 보관 작업도
오사카 코리아타운을 찍은 내 사진이 걸린 세계의 한인 디아스포라 관련 전시 개막식 참석을 위해 지난 3월 중순 오랜만에 워싱턴 D.C.에 다녀왔다. 마지막 하루는 도시를 천천히 돌아봤다. 백악관 근처 렌위크 갤러리에 갔다가 근처 ‘블랙 라이브스 매터’(Black Lives Matter)라는 글귀를 바닥에 써놓은 거리가 떠올랐다. 이 역사적 현장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맙소사! 글귀를 지우고 있었다. 깜짝 놀라 검색을 하니 더 기가 막혔다. 2024년 트럼프 당선 이후 연방정부 예산 삭감을 경고하는 공화당 소속 국회의원들의 압박으로 워싱턴 D.C. 시장이 어쩔 수 없이 지우기로 했다고 했다.
지난 2020년 초여름 미국 전역을 뜨겁게 달군, 흑인에 대한 경찰 폭행 규탄 시위를 상징하는 흔적이다. 그 일을 기억할 수 있게 남겨둬야 하는데 정치적 상황으로 사라진다니 아쉬웠다. 민주당에서 다시 대통령이 나온다면 꼭 다시 되돌려놓기를 희망했다. 정치 상황에 따라 뭔가의 운명이 달라지는 일은 이곳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치만 그런 것도 아니다. 사회 변화에 따라 도시의 구석구석은 계속해서 변하고 있다. 그러니 옛것이라고 모두 다 남겨둘 수는 없다. 서울은 어떨까.
서울, 하면 오래된 것을 금방 버리고 특색 없는 건물을 마구잡이로 짓는 도시로 치부하곤 한다. 서울이나 한국에 사는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심지어 한국을 자주 방문하는 외국인들도 그렇게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조선 시대 한양에 뿌리를 둔 서울에는 중요한 문화유산이 곳곳에 남아 있다. 창덕궁과 종묘를 비롯해 조선 왕릉 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었다. 경복궁이나 숭례문 같은 국보급 문화유산은 물론 국가와 서울시가 지정한 문화유산도 많다. 역사적 가치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오랜 시간 견고하게 이어져 왔기에 모두 국가유산청의 지원과 관리를 받고 있다. 런던, 파리, 베이징 등 다른 나라의 오래된 수도들 모두 비슷하다.
그런데 20세기 이후 유산은 사정이 좀 다르다. 일제강점기 지배 세력을 통해 일본과 서양 문화가 빠르게 들어오면서 예전에 없던 건축물과 생활 방식이 보편화되었다. 해방과 외세로 인한 분단을 거치면서 1960년대 이후 남한의 공업화, 도시화가 빠르게 전개되었다. 이처럼 워낙 변화가 빠른 격동의 시기였던 까닭에 20세기 내내 무엇을 어떻게 남길까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고민도 해볼 여유가 없었다. 먹고 사는 것이 급선무였고 빠르게 달라지는 현실에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1980년대 이후 생활과 교육 수준이 올라가고 민주화를 이루면서 역사적 건물과 풍경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북촌 한옥 밀집 지역을 보존 지역으로 지정했고 서울역 같은 근대 건축물을 보존하기로 했다. 사라진 문화유산 복원과 복구에 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고, 일제강점기 흔적은 철거하기도 했다. 경복궁 앞을 가로막던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가 대표적이다.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과는 별개로 도시의 개발 압력 또한 거세졌다. 특히 전면철거 형식의 재개발이 계속 이어졌다.
2000년대 말부터 새로운 유행이 등장했다. 일상 속 추억이 담긴 공간에 대한 관심으로 대상이 넓어졌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서울의 오래된 동네 답사가 인기를 끌었고 심지어 젠트리피케이션을 불러올 만큼 ‘핫플레이스’로 부상하는 곳들도 여럿 등장했다.
오래된 지역의 ‘재발견’은 2010년대 도시재생의 방향에도 영향을 미쳤고, 서울시의 새로운 시도로 이어졌다. 그 가운데 ‘서울 미래유산’ 지정이 있다. 2013년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건물뿐만 아니라 ‘시민생활’, ‘도시관리’, ‘정치역사’, ‘산업노동’, ‘문화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공통의 기억과 감성이 있는 유산을 알리고 보존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오래된 식당과 가게는 물론 영화 '귀로'와 소설 '서울은 만원이다' 같은 문화 콘텐츠부터 설렁탕, 지하철 1호선 등도 지정 대상이었다. 전문가, 시민단체, 일반 시민들이 추천하면 미래유산 보존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선정을 결정한다. 식당이나 가게 같은 사업체라면 최소한 40년 이상 되어야 한다는 조건도 두었다. 현재 499건에 달하는 ‘서울 미래유산’은 서울시의 엄격한 보존 관리는 받지 않지만, 소규모 수리 및 환경개선을 위한 수리와 홍보물 제작 등에서 지원을 받고 있다.
한 번 지정했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 건 아니다. 2013년부터 올해 초까지 약 25곳이 문을 닫았다. 예를 들어 신촌역 인근에 있던 ‘복지탁구장’은 2020년 말 코로나19로 인해 영업에 타격을 입고 문을 닫았다. 1946년 산둥성 출신 화교가 동작구에 개업한 중식당 대성관도 2022년 사라졌다.
‘서울 미래유산’이 사라지는 것을 두고 제도적 문제에 대한 지적도 없지 않다. 하지만 사회 변화에 따라 시민들의 취향이 달라지거나 시장 논리로 인해 영업이 어려워진 부분은 어쩔 수 없어 보이기도 한다. 애초에 ‘서울 미래유산’의 선정 취지는 엄격한 관리를 통해 예전 상태를 박제화하는 것이 아니라 무형 유산을 포함해 서울의 다양한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데 있기도 했고, 공적 자금으로 특정 사업체에 지원하는 것에 대한 형평의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시도가 무의미한 걸까? 절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다른 도시에서 ‘서울 미래유산’ 제도에서 배울 점이 있다. 하나는 전통적으로 보존의 대상으로 여겨온 건물이나 도시 경관과 함께 무형의 자산, 오래된 사업체, 문화 콘텐츠 같은 도시에 대한 공통의 기억과 감성과 관련 있는 것을 문화유산으로 지정한다는 발상이다. 또 하나는 근현대의 다양한 문화유산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을 높임으로써 그 관심을 통해 보존을 유도하는 방식이다.
만약 ‘워싱턴 D.C.미래유산’이 있었다면 많은 시민의 호응을 받았던, 백악관 앞 ‘블랙 라이브스 매터’의 노란 글씨도 진작에 지정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돌아온 트럼프의 거센 폭풍 앞에서 남아 있었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쉽게 치울 수는 없었을 것이고, 치운 뒤 그 행위에 대한 역사의 평가도 더더욱 무거웠을 것이다.
로버트 파우저 전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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