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사이, 선택을 강요받는 기업들
현지화의 그림자, 미국의 까다로운 조건
중국의 유인과 견제, 기술을 둘러싼 줄다리기
대체불가 기술만이 생존보장
한국 기업들이 강대국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숨 가쁜 줄타기를 이어가고 있다.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같은 전략 산업이 전면에 부상하면서 글로벌 공급망은 외교의 연장선이 됐다. 각국 정부는 자국 중심의 산업 전략을 강화하며 외국 기업에 사실상 ‘내 편에 서라’라는 압박을 주고, 한국 기업들은 복잡한 셈법 속에서 치열한 균형을 모색 중이다. 한국 정부의 리더십 공백 상황에서 총수들은 실질적인 민간 외교관이 됐다.
최근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나 향후 4년간 미국에 31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직접 주재한 글로벌 최고경영자(CEO) 회동에 참석했다. 대국의 압박에 한국 기업들은 미국에는 대규모 투자, 중국에는 경영진 차원의 유화 메시지로 대응했다.
문제는 양국 모두 한국 기업에 구체적인 행동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은 현지화를 넘어서 생산기지 이전을 원한다. 단순한 수출이 아니라 공장을 미국 내에 지어 제품을 생산하고 고용도 창출하라는 주문이다. 여기에 투자 정보 공개 요구, 공급망 보고서 제출 등 기업으로선 감당하기 어려운 의무까지 뒤따른다.
미국에 공장을 짓는 일이 우리 기업에 유리하다고 볼 수는 없다. 인건비는 높고 숙련된 기술 인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주(州)마다 규제 환경이 달라 사업 예측이 어렵고 생산 인프라 역시 지역에 따라 갖춰지지 않은 곳이 많다. 고용이라는 트럼프 정권의 정치적 명분을 충족시키는 대신, 우리 기업은 시장 접근성과 대미 관계 안정이라는 전략적 이익을 얻는다. 하지만 그 대가로 수익성과 운영 효율성을 희생하는 구조다. 투자를 압박하는 정치의 논리와 수익을 우선시해야 하는 기업 현실은 충돌할 수밖에 없다.
중국은 또 다른 방식으로 외국 기업을 압박한다. 자국 산업 보호를 명분으로 반도체 기업에 대한 규제와 견제를 강화하면서도 자본과 고용 유출에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한편으로는 최고경영진을 베이징으로 불러들이며 ‘중국에 남으라’라는 신호를 직접적으로 보내고 있다. 견제와 구애를 동시에 구사하는 전략이다.
한국 기업들은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에 처해 있다. 외교적으로는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사업 전략은 결국 생산기지를 어디에 지을 것인가, 누구에게 기술을 공개할 것인가라는 물리적 결정을 요구한다. 단순한 균형이 아닌 생존을 위한 전략이 절실한 시점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최근 작고한 한종희 삼성전자 부회장의 발언을 다시 떠올린다. 그는 생전에 "아무리 생산기지를 이전해도 우리에게 안전한 곳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생산라인을 무인화(로봇), 자동화해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는 협력사들도 함께해야 한다"고 했다. 각국의 압박으로 생산거점을 옮기고 다양한 리스크에 대응해야 하는 상황에서 결국 기업이 끝까지 붙들어야 할 최후의 해답은 기술 경쟁력이라는 것이다. 그는 "첫째도 대체불가 기술, 둘째도 대체불가 기술, 셋째도 대체불가 기술"이라며 불확실성 속에서도 기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분명히 알려주고 떠났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26일(현지시간) 미국 조지아주 엘라벨에서 열린 '현대자동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 준공식에서 브라이언 캠프 조지아 주지사와 기념 촬영하고 있다. 연합뉴스
원본보기 아이콘박소연 기자 mus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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