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6일 오후 서울 서초구의 한 학원에서 열린 '2026학년도 의·약대 편입 설명회'. 평일 낮인데도 직장인으로 보이는 30대 젊은이부터 아직 대학 신입생티가 역력한 20대 초반 학생까지 40여명이 자리를 채웠다. 설명회의 화두는 최근 의대생들의 집단 휴학에 따라 의과대학 편입 정원이 늘어날 가능성이 있느냐였다.
강연자로 나선 이 학원의 원장은 "사전 조사를 해보니 오늘 설명회에 오신 분 중 이미 메디컬과(치·약·한의·수의대)에 다니고 있는 분들이 많더라"며 "의대생들의 복귀와 제적 여부 등 정책 방향이 확실히 결정돼야 편입학 규모도 정해질 것"이라고 즉답을 피했다. 설명회의 또 다른 강사는 "이미 올해 상위 의대로 옮겨간 의대생들이 많아 편입학 정원이 예년보다 늘어날 것"이라며 "2000년대 들어 단 한명의 편입생도 없었던 연세대 의대 등 그간 열리지 않았던 의대도 편입생을 뽑을 가능성이 있다"고 예상했다.
대한민국 교육 현실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수식어 '의대 공화국'. 전국 이과 수험생 1등부터 3058등까지가 서울대부터 제주대까지 전국 의대를 모두 채운다는 상황에서 의대 정원이 1500명 늘어나자 2025학년도 수능엔 역대급 N수생이 몰렸다. 이 때문에 이공 계열 학과는 의대 열풍의 '직격탄'을 맞았다. 서울대와 카이스트에서 자퇴생이 속출했고, 이미 대학을 졸업한 지 한참된 직장인들은 야간과 주말에 수업하는 의대 재수학원으로 몰려들었다.
의대 증원 정책에 반발해 집단 휴학한 의대생마저 인서울 의대, SKY 의대에 재도전해 의대 '갈아타기'에 성공한 경우도 적지 않은 것으로 추산된다.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교육부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3월부터 올해 2월까지 전국 40개 의대에서 중도 탈락한 의대생은 389명으로 연간 의대 정원(3058명)의 13%에 달했다.
지난해엔 교육부가 의대생의 유급과 제적 등을 막았기에 이 숫자는 대부분 자퇴로 해석된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400명에 가까운 의대생이 중도 탈락했다는 건, 지방의료 강화를 위해 지방 의대 중심으로 증원했지만 기존 의대생들마저 다시 수도권으로 쏠렸다는 의미"라며 "갑작스러운 의대 증원 정책이 지금 신입생 입학 단계에서부터 편입학에 이르기까지 전체 입시 시장을 흔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수도권 대학 교수는 "의대생들이 증원엔 반대하면서 그로 인한 초유의 혼란 상태를 (재수를 통해) 오히려 자신의 신분 상승 기회로 삼았다"고도 꼬집었다.
고소득 전문직 기대에 유치원부터 의대 입시
올해도 대형 입시학원들이 운영하는 기숙학원엔 이과 최상위권 재수생들만 받는 '의대관'이 성업 중이다. 대치동 학원가에서 시작된 '초등생 의대 진학반'은 갈수록 숫자를 늘려가고, 최근 '7세 고시'가 유행처럼 번지는 이유 역시 이런 '의대 열풍'과 이어진다.
의사가 우리 사회에서 선망의 직업이 된 가장 큰 이유는 다른 어떤 직종에 비해 경제적 보상이 확실하고 미래가 안정적이라는 점이다. 보건복지부가 집계한 의사들의 평균 연봉은 2022년 기준 3억100만원, 국세청 자료에 나온 의사들의 연간 평균 사업소득은 4억원, 지난해 보건의료노조가 공개한 의사 연봉은 4억~6억원 선이다.
의사 면허를 갖는 순간 취업 걱정, 정년 제한 없이 평생 일할 수 있고, 소득 하방(최소 연봉)이 보장되며, 인기과 개원의의 경우 한 해 수십억 원의 고소득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 등이 의대 쏠림 현상을 더욱 심화시켰다. 생명을 구한다는 사명감과 보람, 사회적 존경 등은 부차적인 이유가 됐다.
이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의사가 되고자 하고, 부모들은 자녀를 의사로 만들고 싶어한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장래희망을 의사로 정하고 공부해 온 학생들은 의대 입시에 성공하는 순간 이미 고소득 전문직이 보장된 최고의 인재로 대접받고, 의사 면허를 받기도 전에 자신을 의사 집단과 동일시하는 의대 특유의 문화에 빠지게 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대치동의 한 입시학원 대표는 "어느 정도 머리가 좋다는 학생들도 의대에 가기 위해 초등학교 때부터 수학·과학 선행학습을 하고, 중학교 때는 각종 수상 기록과 생활기록부를 챙겨 특목고에 진학하거나 일반고에서 만점에 가까운 내신과 수능 점수를 받아야 하는데 이 과정 과정이 한순간도 쉴 틈 없이 빡빡하게 돌아간다. 부모 역시 한 달에 수백만 원씩 사교육비를 들여 자녀를 이 학원 저 학원으로 실어 나르는 수고를 하니 입시에 성공했을 때 그 노력의 대가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의대생은 합격증을 받아드는 순간 과외 아르바이트를 시작해도 시급 자체가 서울대 일반학과 학생들보다 2배 높다"며 "우리 사회가 모두 의사를 우러러보는 상황에서, 의대생이라면 아주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이미 의사가 된 것이나 다름없으니 본인들 스스로도 최고 전문직, 엘리트 계층이라는 우쭐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1등부터 3058등까지 무조건 의대 지원
의대 증원에 반대하며 시작된 의대생들의 집단행동 역시 이렇게 길러진 예비 의사들의 특권의식과 보상심리를 일면 드러냈다.
충청권의 한 의대생 A씨는 "친구들을 보면 보통 안정적인 직업, 직장을 가지고 싶어 의대에 진학한 경우가 많다"며 "지금 의대생들이 필수의료 패키지 등에 반대하는 데는 확실히 지금 의사들이 누리는 사회·경제적 지위를 미래엔 보장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반영돼 있다"고 털어놨다.
수도권 의대를 휴학 중인 B씨는 "원래 공대 진학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의대를 갈 수 있는 성적으로 공대를 가긴 아깝다는 생각에 의대에 진학했는데, 갑자기 의사 처우나 의료 환경이 안 좋아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최고 엘리트들이 의사를 하게 되면서 우리나라 의료 수준이 획기적으로 발전한 만큼, 이를 바꾸면 의료 수준과 질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이번 의정 갈등이 정부의 논쟁적인 증원 정책에서 시작된 만큼 의대생·전공의들의 반발을 집단 이기주의로 몰아가고 악마화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명예교수는 "정부가 잘못된 정책(의료 개혁)을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이에 반발하는 의대 학생회의 활동을 무력화하고 휴학할 권리를 제한하는 등 책임을 떠넘기려 했다"며 "자유롭게 모여 이야기하고 대책을 찾아야 할 학생들의 구심점을 없애버리는 바람에 일부 강경파 학생들의 목소리만 커지고 그들이 전체를 대변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분석했다.
조인경 기자 ikjo@asiae.co.kr
최태원 기자 peaceful1@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