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규 ‘유혹의 전략, 광고의 세계사’
광고는 시대상을 비추는 거울
자본주의 유지 핵심 제도
변천사 통해 시대 양상 분석

기원전 2000년경 고대 이집트 11왕조 수도였던 테베의 폐허에서 발견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광고문으로 도망간 노예를 찾는 내용을 담고 있다. 푸른역사 제공
문서로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광고는 기원전 2000년쯤 고대 이집트에서 발견된 노예 현상수배 전단이다. 파피루스에 적힌 내용이었는데 도주한 노예에 대한 신상정보를 전하는 와중에 깨알같이 넣은 가게 홍보 문구가 인상적이다. 당시 노예는 광고에 오르내리는 상품으로 취급되는 신세였다. 고대 로마 폼페이 유적은 원형 보존도가 높아 당시 상황을 여실히 드러내는데, ‘알부스’라 불린 입간판에는 노예 검투사들의 시합 공지 내용이 주를 이뤘다.
광고는 시대상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 국내 유수 광고 회사를 거친 저자는 광고의 변천사를 통해 각 시대의 양상을 분석한다. 저자는 광고를 자본주의를 유지시키는 핵심적 사회제도라고 정의한다. 상품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자전거의 양축이라면 광고는 페달을 밟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라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광고는 고객을 설득하는 행위다. 이는 ‘하드 셀’과 ‘소프트 셀’로 구분되는데, 먼저 하드 셀은 이성적 추론과 사유를 추구하는 로고스를 주된 도구로 이용한다. 이렇게 품질이 좋고, 이렇게 저렴하니, 이만한 제품이 없다는 지극히 논리적인 설득법이다. 반면 소프트 셀은 감성을 자극하는 파토스를 공략한다. 분노, 불안, 선망, 경쟁심 등을 자극해 상품 구매를 유도한다.
노예 광고가 최초의 하드 셀이라면 최초의 소프트 셀은 ‘피어스’ 비누 광고다. 1789년 반투명 향료 비누를 만든 앤드루 피어스는 당시 유명 화가인 밀레의 ‘아이의 세계’ 작품을 구매해 비누 광고에 사용하면서 대성공을 거뒀다. 직접적 광고 문구 없이 이미지가 주는 느낌으로 소비자를 공략한 것이다. 반면 그림을 판매한 밀레는 1896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예술혼을 몇 푼 돈과 바꿨다는 일각의 비판을 견뎌야 했다.
흥미로운 점은 두 광고 분류가 경제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호황기에는 소프트 셀이 인기를 얻고, 불황기에는 하드 셀이 우위를 점한다. 19세기 후반 본격적으로 등장한 이래 1920~1930년 이후 하나의 패턴으로 자리 잡았다. 호황일 때는 감성을 자극하는 도전이 허용되지만 불황에는 그런 여유가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 불황이 두드러질 때의 또 다른 특징은 과장광고가 성행한다는 것이다. 1652년 런던의 커피하우스 전단 광고에는 커피 효능에 관해 "소화를 도와주며 기침 예방, 몸이 붓는 증상, 통풍, 괴혈병을 예방하고 치료해 준다"고 소개했다. 음료를 능가하는 약제 수준으로 소개하는 모습이다. 과장광고 개념은 1534년 개인 간 말(馬) 거래와 관련한 ‘피츠허비트 법’이 발효되면서 일찍이 등장했는데, 법조문의 요지는 "구매자 스스로 조심하라"였기에 소비자가 조심하는 것 외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광고 역사가 길고 발달한 서구의 내용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근현대 내용을 다루는 후반부에는 국내 상황도 다소 다뤄진다. 1955년 8월11일자 ‘럭키치약’ 지면광고에는 "미제와 꼭 같은(미국 원료와 미국 처방으로 제조된)"이란 문구를 사용했다. 종전 후 미국 원조 물품에 대한 대중의 우호적 인식에 의지하려는 면모가 엿보인다.
1990년대 초반 맥주 시장을 주름잡은 OB맥주와 그에 도전하는 하이트의 경쟁은 맥주 시장에서 소비자들이 원재료인 ‘물’을 새롭게 인식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당시 OB맥주는 모기업의 계열사인 두산기업이 낙동강에 페놀 독극물을 방류하면서 경남·북의 젖줄을 오염시킨 사건으로 부정적 시선을 감내해야 했다. 이런 점을 이용해 경쟁사인 하이트는 "지하 150m의 100% 천연수로 만든 순수한 맥주"란 슬로건을 내세웠고, 뒤이어 "물이 다르면? 맛이 다르다" "맥주의 90%는 물, 맥주를 끓여 드시겠습니까?"란 도발적 광고문구를 사용했다. 결국 OB맥주는 3년 뒤 업계 1위 자리를 하이트에 내주었다.
유한킴벌리의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 캠페인은 국내 환경 광고의 대표적 사례로 저자는 손꼽는다. 환경 광고는 해당 기업을 둘러싼 이해 당사자들을 호의적으로 포장하는 효과를 부른다. 최근엔 아예 그런 목적마저 배제한 공익광고 성격의 모델도 등장하지만 적어도 유한킴벌리만큼은 환경 광고로 긍정 이미지를 얻는 데 대성공한 사례라는데 이견의 여지가 없다.
저자는 광고의 역사를 조명하며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광고 양상을 분석하고 설명한다. 영국에서 광고에 세금을 매기면서 광고업이 위축된 사례와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이용된 전례, 대공황 당시 최저가격을 전면에 내세우는 새로운 풍조의 등장, 예술의 경지에 이른 현대 광고를 폭넓게 아우른다. 텍스트 뒤에 숨은 시대 배경을 흥미롭고 소개하는 역작이다.
유혹의 전략, 광고의 세계사 | 김동규 지음 | 푸른역사 | 4만5000원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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