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그룹이 미국 조지아주에 전기차 공장을 짓자 국내에서는 부품계열사인 현대모비스를 비롯해 도어 모듈을 생산하는 PHA, 브레이크 시스템을 만드는 서한오토, 도어트림과 콘솔 등 부품기업 서연이화 등 1차 협력업체들이 미국으로 따라나섰다. 자동차 부품뿐 아니라 전기차의 핵심인 배터리를 생산하는 LG에너지솔루션도 조지아주에 공장을 지었다. 이번엔 배터리 공장을 따라 국내에서는 에코프로가 원료 조달을 위해 미국 공장 건설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국내에서 굵직한 회사 5곳이 현대차를 따라 현지 공장을 신설한 것이다. 이태규 한국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부품을 조달해야 하는 제조업 특성상 대기업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새로운 통상질서에 따라 우리 기업들이 미국과 제3의 시장을 찾아 떠나는 건 단순히 기업 한 군데 이슈로 끝나지 않는다. '다 떠나면 한국 제조업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가'라는 국가 차원의 생존 문제로 연결된다. 미국발 관세 폭탄이 한국 제조업 공동화(空洞化)라는 '나비효과'를 부를 수 있다는 얘기다.
GDP 대비 제조업 비중 26%대 정체
제조업 공동화를 가늠하는 지표로 통계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제조업 비중'이 있다. 28일 아시아경제가 2010년 이후 지난해까지 이 지표를 분석한 결과 우리나라의 GDP 대비 26%대를 유지했다. 미국·일본 등 선진국보다 앞서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14%보다 2배가량 높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반도체가 단적인 예다. 핵심 기술 분야는 아직 국내에 있지만 조립·가공 등 저부가가치 공정은 이미 동남아시아로 떠났다. 고부가가치 공정이 반영돼 GDP 대비 제조업 비중은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미국으로 고부가제품 생산기지까지 옮기게 되면 국내에 기반시설은 하나도 남지 않는다.
디스플레이 패널, 배터리 소재 등도 마찬가지다. 수출과 제조업 중심의 경제구조로 성장해온 만큼 생산공장들이 줄줄이 해외로 떠날 경우 국가 경쟁력 약화는 불 보듯 뻔하다. 트럼프 집권 1기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를 지낸 로버트 라이트하이저는 '자유무역이라는 환상'이라는 저서에서 "GDP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숫자 이상으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만큼 제조업이 국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크다는 뜻이다.
강인수 숙명여대 교수는 "제조공장들의 해외 이전은 물론, 인건비 상승 등 국내 노동시장의 경직이 맞물리면서 제조업 생태계가 자본 집약적·기술집약적 형태로 변해왔다"며 통계 수치가 한국 제조업 전반의 질적 변화를 담아내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강 교수는 "제조업 공동화 현상은 일자리 감소 등 우리 경제의 현실적 문제로 직결된다"며 "아직 트럼프 2기 집권 초기인 만큼 당분간 기업들의 해외 진출이 이어지면서 제조업 공동화 현상이 가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반도체는 생산라인과 연구개발(R&D) 기반이 같이 움직인다"며 "생산공장이 해외로 빠져나가면 소재 기업과 협력사, 설비 관련 기업까지 통째로 떠나는 만큼 경제적 파장은 상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미투자 1건당 美 일자리 393개
기업들의 대미(對美) 투자 확대는 내수에도 치명적이다. 2023~2024년 통계청 산업활동 지표를 보면 투자를 포함한 우리나라 수출이 4% 늘어날 동안 내수는 1.7% 감소했다. 내구재 소비(-1.6%→-3.1%), 제조업 내수(-1.1%→-1.6%) 모두 줄었다. 미국 비영리단체 리쇼어링이니셔티브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 기준 미국 내 일자리 창출에 기여한 1위 국가는 한국이었다. 대미 투자 1건당 평균 393개의 일자리를 만들었다. 반면 우리나라는 이 기간 제조업 일자리는 가까스로 감소를 면했다.
이런 문제를 직접 겪어본 당사자가 미국이다. 미국은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까지 제조업 활황기를 맞아 일자리가 2000만개까지 늘어났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글로벌 공급망의 축이 중국으로 이동하면서 100만개 이상의 일자리가 증발했다. 일본도 같은 문제를 겪었다. 1990년대 이후 설비투자 둔화로 제조업 공동화가 가속됐고 국가 경제가 침체기에 빠졌다.
강승원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이후 제조업 설비투자가 미국으로 집중됐지만, 국내 내수 회복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며 "그렇다고 관세 타격을 받을 수 있어 무작정 국내 생산을 유도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수출 다변화 정책이 시급하다는 조언도 나온다. 강남훈 한국자동차모빌리티산업협회(KAMA) 회장은 "미국 현지 생산을 늘리는 만큼 국내 생산(수출)이 줄어들게 된다"며 "국내 공장은 미국이 아닌 제3국을 대상으로 수출을 늘릴 방안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급망 재편 흐름에 따라 국내 일자리 감소를 막을 안전망이 필요하다는 제언도 나온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해외 공장을 늘리면서 국내 공장 투자가 줄어들면 그 타격은 지역 경제로 간다"며 "중장기적 관점에서 기업들의 해외 진출에 따른 급격한 고용 감소를 어떻게 막을지 논의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국내 시장에 투자하는 기업에 대해서는 훨씬 더 과감한 세액 공제나 연구개발(R&D) 지원 등 정부 차원의 유인책이 필요하다"고 부연했다.
박준이 기자 giver@asiae.co.kr
장희준 기자 junh@asiae.co.kr
우수연 기자 yesi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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